가루지기 <509>촉촉히 물기가 고인
가루지기 <509>촉촉히 물기가 고인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3.02.12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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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견례 <80>

옹녀 년이 그래도 미안했는지 어설픈 웃음을 남기고 방을 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 강쇠 놈은 계집의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았다. 제 년 때문이 아니라 서방님 때문이라고 말은 하지만, 옹년 년도 조선비를 만날 생각에, 그 사내와 만나 나눌 질펀한 아랫녁 송사에 가슴이 설렌다는 뜻이었다. 사내의 아랫녁이 그리울 때 계집들이 내보이는 반응이 여러가지지만, 속일래야 속일 수 없는 것이 눈빛이었다.

눈이 유난히 번들거리는 계집일수록 아랫녁도 늘 젖어있었다. 촉촉히 물기가 고인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알게 모르게 흘끔거리는 계집은 사내의 눈길 한 번에도 쉽게 치마를 올리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마누라같지 않은 마누라였지만, 옹녀 년이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조선비를 만나러 가고나자 강쇠 놈은 기분이 영 안 좋았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듯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눈을 감으면 조선비와 얼켜있을 옹녀 년이 떠 올라 머리 속은 서늘히 식는 것이었다.

‘흐참, 내가 씨잘데기 없는 말얼 해가지고 맴고생얼 허는구만이. 시방이라도 가서 끌고 오까? 옹녀가 조선비놈과 아랫녁을 맞추기 전에 델꼬 와뿌리까?’

그런 생각을 하다말고 강쇠 놈이 픽 웃었다. 옹녀 년이 가기 싫다고 뒤로 나자빠졌으면 제 놈이 서둘러 등을 밀었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채피 잡년인 줄 알고 만냈는디, 나 하나럴 위해서 아랫녁얼 간수해줄 계집이 아니란 걸 암서 만냈는디, 내가 씰데없는 생각얼 다 허는구만이.’

강쇠 놈이 흐흐흐 웃다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눈을 감을 때였다. 삐그덕, 사립 열리는 소리에 이어 자박자박 다가오는 발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옹녀가 가다가 돌아오는갑네. 흐기사, 지 년도 염치가 없었겄제. 명색이 서방얼 두고 딴 사내럴 만내러 가는 지 년의 처지가 한심했겄제. 이것언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싶었겄제.’

강쇠 놈은 그렇게 믿었다. 조선비를 만나러 가던 옹녀 년이 되돌아오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발소리의 임자는 마루 끝에 서서 무어라고 두런거리기만 할 뿐, 좀처럼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뭐혀?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왜? 감서 생각해 본깨, 이것은 아니다 싶든가? 괜찮헌깨 들어오소. 조선비헌테 보개피넌 서나서나해도 되제, 머.”

강쇠 놈의 말에 문이 삐긋 열리고 발소리의 임자가 얼굴을 디밀었다. 인월 삼거리 주모였다.

“아니, 아짐씨.”

강쇠 놈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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