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489> 시방부텀 시작허제요
가루지기<489> 시방부텀 시작허제요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3.01.28 1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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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견례 <60>

“먼 일인디요? 설마 밭얼 매돌라는 말씸언 아닐 것이고. 그 일이라면 천금얼 준대도 싫소. 볕에 나앉아봐야 얼굴 타고, 묵잘 것도 없고.”

옹녀 년이 뻔히 짐작하면서도 짐짓 물었다.

“설마하니, 색시헌테 내가 밭얼 매돌라고 허겄는가? 사실언 내일 마천의 조선비가 동무들 여나믄허고 천렵얼 헌다는디, 장이사 봐다놨제만, 장만헐 사람이 없구만. 자네가 나럴 거들어주면 품삯도 듬뿍 주고 묵다남은 음석도 나누어 줌세.”

“사내덜 틈에 끼어 춤추고 노래부를 일이 아니라면 못 헐 것도 없제요. 좋구만요.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닌깨, 시방부텀 시작허제요.”

옹녀 년이 서두르고 나서자 주모가 흐 웃었다.

“흐흐, 자네도 참. 시암에 가서 숭늉 찾을 사람이구만. 머시 그리 급헌가? 서나서나허세.”

“나넌 일얼 앞에 놓고넌 잠시 잠깐도 손얼 못 놀리는 사람이요. 멋 부터 허끄라우.”

“사람 쌈박해서 좋구만. 좋네. 시작허세. 우선언 그럭부텀 반들반들 딱아야허겄구만. 명색이 양반님네들이라고 그럭에 녹이 슬어있으면 지랄헌당깨.”

“양반이 아니래도 녹슨 그럭언 싫제요.”

옹녀 년의 말에 주모가 광방에서 녹슨 그릇들을 꺼내왔다. 우선은 기와가루를 지푸라기에 묻혀 녹부터 닦아냈다. 옹녀가 그릇을 닦는 사이에 주모는 간조기를 굽고, 산나물이며 소고기로 전을 붙이고, 김치도 새로 담그었다.주모와 옹녀가 그럭저럭 천렵준비를 마쳐가고 있을 때였다. 도포차림에 갓을 쓴 서른 살 안 팍의 선비 하나가 찾아왔다. 한 눈에 조선비인 것을 알아 본 옹녀가 흘끔 바라보고는 부억으로 들어갔다.

“어찌 준비넌 다 되어 가는가?”

마루에 앉은 조선비가 주모한테 물었다.

“예, 서방님. 그럭도 깨깟이 딱아놨고, 음석도 장만했구만요. 개넌 내일 새벽에 잡아서 일찌감치 쌀믈라만요.”

“개냄새 안 나게 잘 허소.”

“아무렴요. 된장얼 듬뿍 풀고 생강도 한 두어 근 사다놨응깨, 염려허덜 마시씨요. 개냄새 안 나게 잘 끓일랑구만요.”

“자네만 믿네. 동무들한테 내 낯이나 안 깎이게 해주소.”

“여부가 있습니까? 당최 걱정허덜 마시씨요. 이년이 서방님 천렵준비럴 어디 한 두 번 맡아 해봅니까?”

“흐기사. 헌디, 사람얼 들였는가?” 그사람이요?”

옹녀 년이 제 얘기가 나오는 줄 알고 귀를 쫑긋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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