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지혜와 슬기
뱀의 지혜와 슬기
  • 진동규
  • 승인 2013.01.1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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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모사, 섬뜩한 이름이다. 제 어미를 죽이는 뱀이라는 뜻이다. 제 어미의 뱃속을 다 먹어 치우고 태어난다니 섬뜩할 수밖에.

사람들은 어머니가 뱃속에 차려준 천태무변의 모궁에서 한 생애를 설계한다. 먹고 자는 기본적인 것부터도 떠나 있다. 바람 부는 지상이나 비 내리는 하늘을 운항할 손과 발을 짓는 것이리라. 세상의 소리를 들을 귓바퀴를 또 다듬을 것이다. 큰 소리 작은 소리 구별하여 들어오라고 굽고 휘돌고 얼마나 신경을 썼던가.

살모사는 난태생이다. 알이 완성된 뒤에도 세상에 나오지 않고 어미의 뱃속에 부화의 시기를 기다렸다가 때맞추어 열고 나오는 것이다. 새들처럼 빈 나뭇가지에 알을 걸어놓고 품어야 하는 알을 제 몸으로 품어온 셈이다. 우리 선조들은 알을 품어낸 지혜로움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살모사라 불렀을 것이 아닌가. 가지 끝에서 알을 잃는 일을 아예 차단하는 것이나 찬 피 동물인 뱀으로 태어나 부화하는 데 필요한 온도를 재는 데 제 몸의 그것보다 더 확실한 무엇이 있겠는가.

우연한 기회였다. 살모사의 분만 장면을 본 일이 있다. 묵정밭에 팽개쳐진 항아리 속이었다. 버려진 항아리 인기척이 있을 리도 없고 눈 밝은 매로부터도 안전한 장소였으리라. 쩍 갈라진 항아리에 삼각 구멍이 있었다. 제 몸뚱이가 빠져나가기에는 빠듯한 구멍이었다. 조산원도 간호사도 배암에게는 그 날카로운 항아리 깨진 구멍이 전부였을 것이리라.

꿈틀대는 몸짓, 뒤틀리며 팽팽하게 뻗쳐오르는 긴장의 순간 삐질삐질 살을 터치고 나오는 것들이 있었다. 바르르 떨리던 꼬리도 살모사도 보이지 않았다. 삼각형의 구멍만 있었다. 꼬물대던 새끼들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뱀의 해라고 하니 옛날 헤어진 살모사 생각이 새삼스럽다. 물이 마시고 싶다고 느껴질 때쯤에는 제 어미가 빠져나간 그 삼각형 문이든 아니면 반쯤 썩어가고 있는 바지랑대를 감아 오르든 제 길을 찾아 갔으리라.

지난 한 해는 우리에게도 혹독한 가뭄과 불볕더위가 있었다. 모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엄혹한 가뭄이었다. 바로 뒤이어 쌍태풍에 물난리까지 겹쳤다. 마야인의 달력이 종말을 예언한 것이라는 소문이 골목골목 흉흉했다. 그런 속에서 역사의 한 파고는 우리의 눈앞에서 장엄한 막을 올렸다. 사뭇 기대된다.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북한까지 새로운 무대를 찬연하게 꾸밀 것이 아닌가.

참 벽두에 첫 안줏거리가 왔다. 사뭇 군침이 돌게 하는 마상주가 아닌가. 천만 관중 시대를 열겠다는 야구계의 십구단 창단이 그것이다. 겉으로는 전주와 수원의 지역기반 싸움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그런 것엔 관심이 멀다. 누가 낙점을 받으면 어떤가. 지자체장들까지 핏대를 세우면서 지역정서를 또 끌어대고 그랬다. 국가는 복지국가로 가고 있는데 창단을 하겠다는 구단주들은 엉뚱한 계산들만 해대는가.

구단의 선수를 양성해야 하는 고등학교가 오십사 개 학교다. 이 숫자를 십구단으로 나누면 한 구단이 다섯 학교쯤을 연고로 삼아야 한다. 그러면 거기에 이어서 중학교, 초등학교는 또 얼마나 따라야 하는가. 합숙까지 해야 하는 학생들은 생각이나 해 보았는가 묻고 싶다. 야구공 하나만 바라보는 그들은 교실 수업은 한 시간도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이나 해보았는가 말이다.

‘조성민 같은 선수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 만약 이번의 두 구단이 이렇게 복지를 챙기겠다고 나섰다면 아마 둘 다 낙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야구 역사도 바꿔 놓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진동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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