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463> 서방님도 아직언 심이 팔팔허고
가루지기 <463> 서방님도 아직언 심이 팔팔허고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3.01.09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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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견례 <34>

그제서야 눈을 뜬 강쇠 놈이 볼멘 소리로 물었다.

주책없는 놈이야 언제든지 주인이 마음만 먹으면 벌떡 고개를 쳐들 것이지만, 허리가 욱신욱신 쑤시는 것이 떡을 쳐도 너무 심하게 친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일만 실컷 하고 끼니는 거른 셈이라 뱃가죽이 등가죽하고 맞장을 뜰 지경이었다.

계집의 은근한 수작이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니라, 누가 왔는갑소.”

옹녀 년의 말에 강쇠 놈이 소리나지 않게 후닥닥 일어나 옷부터 걸치고는 뒷문 쪽으로 북북 기어 가 문고리를 잡았다. 여차하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요량이었다. 옹녀 년의 누가 찾아왔다는 말에 혹시 인월의 정사령 놈이 아닌가 싶은 것이었다.

그 놈이 제 집에 들렸다가 어찌어찌 제 마누라와 아랫녁을 맞추었다는 소문을 듣고 잡아 죽이겠다고 찾아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발에 오줌누는 정사령 놈 쯤이야 맞딱뜨린다고해도 힘껏 밀치고 도망을 치면 되겠지만, 천하에 볼품이라고는 한 푼어치도 없는 쥐새끼 상통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강쇠 놈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옹녀 년이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 저고리 고름을 매면서 밖을 향해 물었다.

“누구시다요?”

그러자 이내 밖에서 사내의 어눌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 쩌그 저, 나넌 웃말 사는 박가인디, 아짐씨헌테 디릴 말씸이 있어 왔는디요.”

“나헌테 먼 허실 말씸이 있으끄라우?”

옹녀 년이 뚫어진 문구멍으로 밖을 살피는데, 강쇠 놈이 문고리 잡은 손을 놓고 돌아 앉았다. 목소리가 정사령 놈의 것이 아니었다.

“지가 운봉 이부자 어르신댁의 산내골 논얼 소작짓던 사람인디요, 그 댁 마님 말씸이 올해부텀언 아짐씨가 논 주인이라고해서 왔구만요.”

산내골 논을 소작짓던 사람이라는 말에 옹녀가 문을 활짝 열었다. 나이 마흔이나 되었을까, 어수룩하게 생긴 사내가 토방 아래에 서서 두 손을 마주 잡고 허리를 굽신거리고 있었다.

“아자씨가 내 논얼 소작지었소? 헌디, 올해부텀언 내가 농사럴 질라고 허는디, 어쩌끄라우? 겁나게 미안시럽소만, 내 서방님도 아직언 심이 팔팔허고, 나도 내 한 몸 거천언 헐만헌깨, 농사럴 지어볼라요.”

옹녀 년의 말에 웃말 박가의 얼굴에 당장 먹구름이 끼었다.

“그래라우? 직접 농사럴 지신다고라우? 하이고, 이것 큰 일났네.

그 논이 우리 다섯 식구 목심줄이었는디, 이 일얼 어쩐다요? 그 논 열마지기만 믿고 따로 소작도 안 얻었는디, 우리 다섯 식구 다 죽게 생겼는디, 이 일얼 어쩐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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