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觀點)을 찾아서
관점(觀點)을 찾아서
  • 이동희
  • 승인 2013.01.07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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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진은 디지털이 대세다. 다기능 카메라가 됐건 스마트폰으로 찍어대는 사진이 됐건 디지털로 찍고 보관하고 처리한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많이 찍어도 필름이 소모되지 않으니 그리 걱정할 것이 없다. 일단 찍은 다음 맘에 들지 않으면 ‘삭제’ 명령에 손가락 끝만 대면 그만이다. 그래서 사진작가가 아니라 생활사진을 찍자면 ‘결정적 한 방’에 덜 신중해도 된다. 그저 일단 찍고 나서 처리방법을 선택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디지털 사진을 찍을 때 유념하지 않으면 낭패할 수가 있다. 셔터를 누를 때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아날로그 카메라도 그렇지만 특히 디지털 카메라의 단점은 초점이 흐려지기 쉽다는 점이다. 디지털 사진기의 다양한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초점이 흐려진 사진으로 감상할 만한 영상미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흐리멍덩하고 애매모호함이 주는 ‘우연의 명작’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초점 흐린 사진은 삭제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사물을 보는 관점(觀點)이 흐린 생각 역시 명쾌한 사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관점이 흐린 주장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없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구랍(舊臘) 대통령선거의 투표를 마치고 친지 몇이 모여서 개표방송을 함께 시청하면서, 개표방송에 대한 사후 관전평을 검색하면서 관점의 차이를 실감하였다. 개표 결과야 ‘멘붕’을 겪은 사람이건, 환호작약하는 사람이건 이미 판가름났지만, 개표방송의 화면을 응시하던 착잡한 심정은 잔영으로 오래 남을 것이다. 한반도 남쪽 지도에 시도별로 득표를 많이 얻은 후보의 색깔로 지역 전체를 칠한 영상이 지금도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듯하다.

한반도 전체가 붉은 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가운데, 한반도 서남부-웅크린 호랑이 아랫배에 감춰진 뒷발 근처와 복부에 해당하는 서울에 배꼽만 한 점이 노랗게 칠해져 있을 뿐이었다. 마치 거대하게 밀려오는 붉은 쓰나미[津波-tsunami]가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도 서로 달랐다.

그래도 이런 결과를 보여준 민심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관전평을 토로하는 친지가 있는가 하면, 호남이 무슨 선지자나 독립운동가나 된 듯이 독야황황(獨也黃黃)하다며 자괴감을 피력하는 이도 있었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사유에 대한 초점을 맞추려고 작동했을 민심의 현주소를 읽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강요된 억압 선거도 아니고, 무슨 체육관 선거도 아니며, 아전인수-초록은 동색-팔이 안으로 굽듯 연고주의에 매몰되어 내 지역 후보를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아닌 선거에서 열 명 중 아홉 명이 한 후보를 지지하는 결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자부심을 느낀다는 관전평에 숙연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공감은 필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붉은 색이 짙은 지역의 유권자가 인터넷에 쓴 댓글-‘호남인들의 흔들리지 않는 가치 지향적 투표에 경의를 표한다’는 관점도 있었다.

개표방송의 편협한 의도성도 도마에 올릴만하다. 미국의 선거제도처럼 한 표라도 많이 얻은 후보가 그 지역의 선거인단을 독점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나라의 투표결과를 이렇게 표시하는 것은 다분히 숨겨진 의도가 작동한다고 의심할 만하다. 투표결과 대략 51%:48%의 결과였으면, 빨강과 노랑 색깔의 농도나 분포를 배려하여 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표 방송관계자들이 이를 모를 리가 없다면, 이 점 역시 개표의 관점을 흐리게 하여 민심의 현주소를 호도하려는 숨은 의도가 작동했다고 볼 수 있을 만하다. 언젠가 웅크린 호랑이가 포효하며 뒷발을 차고 오를 때 세상은 또 한 번 민의의 쓰나미가 올 날도 있을 것이다.

평생직장이라며 성실히 일하던 노동자가 회사로부터 명확한 근거도 없이 해고통지를 받았다. 노동자는 ‘해고는 곧 살인’이라며 해고무효투쟁을 벌인다. 대선 이후 그런 노동자 몇 명이 절망적 심정을 죽음으로 대신했다. 이를 바라보는 일부 시민의 관점이 참 각박하다. ‘해고당했으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 더 열심히 일해야지 자살만이 해결책이냐?’며 힐난한다. 약자를 동정하고 응원하고 배려하던 한민족의 인정주의가 이런 사안에는 왜 작동하지 않을까?

내 놓을 것, 내 걸 것, 바칠 것, 유일하게 지닌 것이라곤 목숨뿐인 사람들의 절규를 무슨 배부른 사람 반찬 투정하듯이 바라보는 시민-유권자가 있는 한 우리의 현대사는 한참 흔들리며 초점[관점] 흐린 사진을 찍어낼 것이다. 시대와 역사에 대하여 사람의 가치를 최우선시하는 인문주의적 관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게 필요한 이유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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