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459> 안 묵어도 배부르요
가루지기 <459> 안 묵어도 배부르요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3.01.0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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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견례 <30>

“날도 어두어지고, 세상 천지에 우리 둘 백이 없는디, 금방 벗을 바지를 입어 멋헌다요? 귀찮기만허제요.”

“흐기사, 자네 말이 옳네. 헌디, 집에 가면 묵을 것은 있는가? 내가 돈 백냥이나허고 금가락지야 하나 있네만. ”

“운봉 이부자 집에서 가져 온 쌀이 한 가마는 남았을 것이요. 괴기 사 묵고 떡 사묵니라고 한 가마는 펄쌔 내 뱃속에서 똥된지 오래고.”

“쌀이 한 가마나 있으면 우리 두 사람 두어달은 그럭저럭 묵고 살겄구만.”

“안 묵어도 배부르요. 생전 첨으로 양반님네 진수성찬을 실컷 묵은 것 같소.”

“나도 그런디, 임자도 그런가? 어서 가세. 그놈이 또 요동을 안 치는가?”

“이년도 알고 있구만요.손언 깝깝허다고 꼼지락거리고 있소.”

“우리 잘 살아보세. 속궁합도 잘 멎겄다, 당분간언 묵을 것도 있겄다. 세상에 우리만큼 팔자좋은 사람도 없을 것이구만.”

“엊저녁에 꿈도 안 꿨는디, 내가 먼 횡잰가 모르겄소. 땅에서 솟드끼, 하늘에서 떨어지드끼 서방님을 만내다니요.”

“우리 두 사람 만낸 것이 꿈언 아니겄제?”

“꿈언 아니요. 요놈이 글구만요. 꿈언 아니람서 꼼지락대고 있구만요.”

“허, 천생연분일쎄. 하늘이 점지해 준 연분일쎄.”

두 연놈이 도란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살방아부터 찧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옹녀 년이 주막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장국밥을 끓여 마파람에 게눈 감추 듯 감추고 떡판부터 챙겨놓고 떡을 치기 시작하는데, 떡메를 어찌나 힘차게 내리쳤든지 서까래가 울리고 방바닥의 구들짱이 내려앉을 지경이었다.

떡메가 내려칠 때마다 옹녀 년이 하이고, 존 것, 하이고, 죽겄는 것, 거그요, 거그럴 콕콕 야물딱지게 찧어보씨요, 어쩌고 주절거리다가 손으로 가만가만 강쇠 놈의 등짝도 쓸어보고, 이마며 볼따구니도 쓰다듬어 보았다. 사내는 그리 오랜 시간을 살방을 찧었는데도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있었다.

지금껏 만난 사내들은 방아고가 문전에 들자마자 게거품을 물고 나딩굴었는데, 강쇠 놈은 여전히 씩씩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한정없이 살방아만 찧을 수도 없었다. 성질급한 놈인지, 아니면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 멀리 사람사는 동네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었다.

“징허요이. 그러다가 방아확이 구녕이 나뿔겄소.”

“으떤가? 실퍽헌가?”

“실퍽허요. 눈이 실실 갬기는 것이 잠이올랑갑소.”

“긍가? 나도 잠이 와서 죽겄는디, 임자도 그런가? 허면 나도 끝낼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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