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444>씨받이로 들어갔다가
가루지기 <444>씨받이로 들어갔다가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2.12.26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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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견례 <15>

옹녀가 몸을 일으키려다가 털썩 주저앉자 섭섭이네가 물었다.

"쌀구루마만 챙겨주면 시방 떠날 것이여?"

"그럴라요."

"알았구만. 내가 마님께 그리 전허제."

섭섭이네가 부리나케 돌아갔다가 이내 다시 왔다.

"가세. 박서방이 구루마에 쌀얼 실어놓고 지달리고 있구만."

"그럽시다. 이왕이면 간장이며 된장겉은 건개도 좀 실어놓제요."

"안 그래도 내가 몇 가지 실어놨구만. 산내골 집이 사람사는 동네허고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 건개 얻어묵는 것도 심들 것 같애서."

"고맙소, 아짐씨. 낭중에 꽃 피면 한 번 놀러 오씨요."

"흐, 썩을 년. 넘의 집 살이 허는 년이 꽃구경이 당키나 허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섭섭이네가 입가에 벙긋 웃음을 띠었다. 이 년 저 년하면서 욕지기는 내뱉아도 마음이 악한 아낙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 갈라요, 성님. 만수무강허시씨요."

안 방 앞에 서서 옹녀가 작별인사를 했으나 이천수의 마누라는 헛기침 한번 하지 않았다.

대꾸없는 방문을 향해 눈을 한 번 흘겨주고 옹녀가 쌀구루마 위에 몸을 싣고 이천수네 집을 나왔다.

가는 길에 주막에 들려 논문서를 찾고, 박서방한테 장국밥과 탁배기 한 병을 사 먹였다.

"사내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니 년이 그 골짝에서 며칠이나 버틸랑가 두고보자이."

운봉 주막의 주모가 함께 살자는 것을 마다고해서 그런지 헤어지는 순간에 악담을 했다.

"그런 말씸 마시씨요. 사내라면 입에서 신물이 나요. 앞으로넌 가운데 다리 달린 짐승허고는 상종않고 살라요."

"흐, 산내골에 사내초상날 일언 없겄구만. 어떤 년언 복도 많아."

주모가 침을 찍 내갈겼다.

'흐흐, 주모 아짐씨가 샘이 났는갑구만. 씨받이로 들어갔다가 헌 일도 없이 논 열마지기에 초가일 망정 집 한 채에 돈얼 백냥이나 챙겨가꼬 쌀구루마 타고 간깨, 시암이 났는갑구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옹녀가 보따리에서 돈 서른냥을 꺼내어 주모 손에 쥐어 주었다.

"멋인가?"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다 주모 아짐씨 덕이 아니요? 중천비라고 생각허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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