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녀가 표독스레 내뱉는데, 섭섭이네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보따리 하나를 마루에 툭 던졌다. 제법 덜퍽 소리가 나는걸로 보아 이천수 마누라가 약조했던 돈백냥과 집문서가 들어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 옹녀 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멋이요? 그것이."
"마님께서 약조허신 돈 백냥허고 산내골에 있는 집문서일쎄. 집언 비어 있응깨, 소제만 허면 당장이라도 잘 수 있을 거구만. 어서 떠나게. 마님 말씸이 따로 인사럴 챙길 필요넌 없다고 했네."
"내가 못 나가겄다먼요?"
옹녀 년이 이미 마음의 작정을 했으면서 짐짓 물었다.
"가는 것이 좋을 것이여. 마님얼 센찮게 보면 큰 코 다쳐. 한번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는 분이여. 시방사 자식도 못 낳고 헌깨 성깔이 많이 죽었제만, 한 때는 그 성깔 이겨묵을 사람이 운봉인근에서는 없었구만. 아랫것덜이 잘못허면 첨 한두 번언 눈얼 감아주다가도 세 번 네 번 잘못허면, 그때는 어장얼 내는 분이여. 어디 그 뿐인 줄 알어? 한번언 오입허고 들어온 서방님의 바지럴 벳겨놓고 아무데나 내두르는 이놈의 물건을 짤라뿌리겄다고 은장도를 휘두른 분이여. 자네겉이 한찮은 계집 하나 쯤 물고를 내는 것은 식은 죽먹기구만. 존 말로 헐 때 나가는 것이 상책이여."
섭섭이네가 마루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주섬주섬 주어 섬겼다. 낯빛으로 보아 이 쪽을 겁주려고 그냥 해 보는 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사람이 한 번 죽제, 두 번 죽소. 죽일라면 죽이라제."
옹녀가 고개를 외로 꼬았다.
"허참, 내 말대로 허랑깨. 안 그러면 내 손에 지게 작대기가 들릴지 몰라, 이 년아. 마님이, 옹녀 저 년을 쳐 쥑이라고 허시면 쎄려 쥑이는 수 밖에 있간디, 정 내 손에 지게 작대기를 들게 헐 판이여?"
섭섭이네가 이번에는 눈을 부릎 뜨고 노려 보았다.
"흐따, 아짐씨가 독살시럽기도 허요이. 눈에서 살기가 도요."
옹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보따리를 끌어당겼다. 어차피 따로 챙겨들고 나갈 다른 봇짐도 없었다.
"쌀도 두 가마럴 준다고 했는디, 그것언 어쩐다요?"
"낼이라도 박서방얼 시켜 보낸다고 했구만."
"그럴 것이 멋이다요? 쌀얼 두 가마럴 옮길라면 어채피 구루마를 챙겨야헐 판인디, 시방 돌라고 허씨요. 며칠 동안 맴얼 앓아서 그런지 내가 다리에 히말때기가 하나도 없소. 쌀가마 우에 앉아서 갈라요. 산내골에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