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442>도독년
가루지기 <442>도독년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2.12.25 1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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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상견례 <13>

성님, 제발 이 년얼 나가라고 허지 마시씨요. 꼭 나가라고 허실라거든 차라리 이년얼 쥑여뿌리씨요. 살아서는 이 집얼 못 나가겄구만요."

옹녀가 말끝에 눈 빤히 뜨고 이천수의 마누라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참말로 우리 집 양반의 씨를 받았는가?"

"안 받은 씨를 받았다고 했다가 그 벌얼 어찌 다 감당헐라고요? 천벌이 내릴 일이제요. 은대암 부처님께 맹세코 씨럴 받기넌 받았구만요."

"그 씨가 쭉정인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이렇게 허면 어쩌겄는가?"

이천수의 마누라가 은근히 말했다.

"어뜨케요?"

"자네를 이 집에 두고는 내가 하루도 맘 편히 못 사네. 내 자네헌테 집 한 채를 줌세. 산내골에 가면 소작인이 살던 초가집이 한 채 있네. 그 집얼 자네헌테 줌세. 글고 내가 돈백냥에 쌀 두 가마를 내줌세. 산내골에 가서 살면 안 되겄는가? 돈 백냥이면 자네 한 몸 일 년언 묵고 살 것일쎄."

"글씨요이."

옹녀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이천수의 마누라가 손을 덥석 잡고 나왔다.

"그렇게 허세. 자네가 멀 걱정허고 있는가도 내가 아네. 혹시나 내 서방님의 씨가 자네 뱃속에 자리를 잡지 않았는가, 그걸 걱정허는 걸 다 알고 있네. 허나, 아까도 말했지만 내 서방님의 씨는 쭉정이네. 아직꺼정 달마다 달거리를 꼬박꼬박허는 내가 아는 일일쎄. 섭섭이네도 알고 있네. 그래도 만에 하나 자네가 내 서방님의 씨를 받아 자식이 태어난다면 그때는 따로 생각해보세. 자네가 이 집에 들어와 함께 살아도 좋고, 정말 자네가 아들이라도 낳아 대를 이어준다면, 내가 이 집이라도 내어줌세. 허니, 이번에는 내 말대로 허세."

이천수의 마누라가 눈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사정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당장 예, 그러겄소, 하고 나간다면 너무 경망스러워 보일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겄구만요, 하고 안방을 물러나와 별채 제 방에서 한 나절을 곰곰이 궁리에 잠겨있는데, 섭섭이네가 눈을 새치롬하게 뜨고 찾아왔다.

"도독년."

섭섭이네가 입가에 비웃음을 매달았다.

"먼 소리요?"

"논문서도 모잘라서, 집문서에 돈 백냥꺼정도 모잘라서 생각해 보겄다고? 참말로 니 년이 이 집에서 살고 싶은겨?"

"그렇소. 안방마님얼 성님으로 모시고 천년만년 살고 싶소. 헌깨, 아짐씨는 내 일에 감놔라 배놔라 상관허지 마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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