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441>발정난 사내놈들의 눈길
가루지기 <441>발정난 사내놈들의 눈길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2.12.24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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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견례 <12>

"멋이여? 호락호락헌 년이 아니다?"

"아, 안 그요? 씨럴 뿌리라고 밭을 내준 대가로 논문서를 받았는디, 기왕지사 씨넌 뿌렀는디, 논문서럴 내노라고 허니, 성깔 안 날 년이 어딨겄소? 성님겉으면 그럴 수 있겄소?"

"성님?"

이천수의 마누라가 픽 웃음을 흘렸다.

"아, 한 서방님얼 뫼셨응깨 성님동상이 아니요? 앞으로도 이년언 동상 노릇 잘 험서 이 집에서 살라요. 성님얼 성님으로 잘 뫼심서 살라요. 다행이 아덜이라도 낳게 되면 그 아들 성님 아들로 디리고 성님 뫼시고 살라요."

옹녀의 말에 이천수의 마누라가 잠깐 궁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 없네. 설령 자네가 씨를 받았드래도 그 씨가 싹이나기는 애당초 글렀네. 그 양반은 죽은 씨를 가진 남정네여. 달마다 달거리 잘허는 계집헌테도 씨를 못 내리는 양반이여. 내가 백번 양보험세. 논문서는 없는 걸로 할 것이니, 오늘 당장 내 집에서 나가게. 내 서방님 잡아묵은 자네 얼굴 두 번 다시 보기 싫네."

이천수의 마누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부터 논문서를 돌려받을 요량도 아니면서 논문서 얘기를 꺼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자기를 어수룩하게 보고, 논문서를 돌려달랬다가 돌려주면 좋고 안 돌려주어도 그만이라는 배짱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옹녀의 머리 속으로 간교한 궁리 하나가 떠올랐다.

"못 나가겄구만요. 나가봐야 집도 절도 없는디, 이 집을 나가 어디서 산다요? 글고 한 번 씨받이로 들어가면, 그래서 씨를 받으면 열 달은 그 집에서 사는 걸로 알고 있소. 씨가 내렸는가, 그 씨가 싹이 나서 잘 크고 있는가, 지켜봄서 열 달은 산다고 들었소. 주모 아짐씨가 그럽디다."

어차피 억지였다. 문중 사내들을 데려다가 몽둥이질로 내쫓는다면 꼼짝없이 쫓겨날 판이었다. 문중 사내들을 부르지 않고 혼자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말썽이 담 밖을 넘지 않고 조용히 처리하려고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호락호락 물러 날 옹녀 년이 아니었다. 이천수의 마누라가 꼬리를 내렸으니, 이번에는 이 쪽에서 꼬리를 세울 차례였다. 그래서 못 나가겠다고 한 것이었다. 서방 잡아 먹은 계집을 날마다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었다. 이천수 마누라가 그?? 하면 함께 살세, 하고 나올까봐 속은 켕기면서도 옹녀가 겉으로는 고집을 부리고 나갔다.

"그래서 내 집에서 열 달을 살겠다?"

"글구만요. 놀고 묵기에는 이 년도 염치가 없응깨, 부억일이라도 험서 살랑만요. 들 일이라도 험서 살랑만요. 나가봐야 어느 주막의 부억데기 백이 헐 것이 없는디, 발정난 사내놈들의 더러운 눈길얼 어찌 보고 산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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