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438>넉살도 좋네 얼굴도 두껍네
가루지기<438>넉살도 좋네 얼굴도 두껍네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2.12.23 1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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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견례 <9>

눈에 서슬을 띠고 노려보자 섭섭이네가 방에만 쳐박혀있지 말고 나와서 일손을 거들라는 말을 남기고 엉덩이를 뗐다.

"흐, 섭섭이 아짐씨도 속모르는 소리 마씨요. 내가 초상 마당에 얼굴얼 비쳐보씨요. 사내 잡아 묵은 년이라고 이놈도 흘끔, 저 년도 기웃, 흘끔흘끔 기웃기웃거릴 판인디, 그 꼴얼 어찌 본다요. 나넌 죽은듯이 있을라요. 긍깨, 끼니 맞추어서 밥이나 한 술씩 가져다 주씨요. 그래도 이 집에서 아짐씨 백이 나럴 챙겨줄 사람이 누가 있소. 이년이 아짐씨 속얼 알고, 아짐씨가 내 속얼 알고. 끼리끼리 묵고 삽시다."

"흐, 그 년 참, 넉살도 좋네. 얼굴도 두껍네."

그런 말을 남기고 섭섭이네가 돌아 간 다음 옹녀가 이번에는 마음놓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생각할 수록 허망했다. 아니, 자신의 몸둥이가 무서웠다. 무슨 살기를 타고 났길래 만나는 사내마다 고태골로 간단 말인가?

'빌어묵을 작자겉으니라구. 그리 허망허게 황천길로 갈 것을 왜 또 그리 보챘당가이. 내가 다시 사내놈을 내 배우에 얹으면 울엄니 딸내미가 아니구만. 신물난다, 신물이 나, 배우에서 송장 치우기도 이가 갈리도록 신물이 난다.'

옹녀년이 이를 부득부득 갈아대는데, 섭섭이네가 개다리 소반을 들고 왔다.

"미운정도 정인디, 어쩌겄냐? 기왕에 죽은 사람언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언 살아야 안 쓰겄냐?"

"고맙소, 아짐씨."

밥상을 끌어당겨 밥 한수저를 듬뿍 떠서 입에 넣는데 목울대가 컥 막히면서 뜬금없이 옹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기어내려왔다. 손등으로 눈물을 쓱 훔치다 말고 옹녀가 섭섭이네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웃지 마, 이년아. 그러다 정 들라."

섭섭이네가 눈을 하얗게 흘겼다.

"허망해서 웃소. 기구헌 팔자가 제우제우 펴지는가 했는디, 끈 떨어진 뒤웅박이 되고본깨, 이 년의 처지가 한심해서 웃음이 다 나왔갑소."

"그나저나 어쩔티여?"

"멀 말씸이요?"

"이 집에서 살 수는 없잖혀?"

"씨럴 받았응깨, 그것이 싹이 나는가 어쩌는가는 지달려봐야 안 쓰겄소?"

"멋이여? 씨럴 받아?"

"그것 받자고 내가 이 집에 안 들어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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