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에 띄우는 詩
세밑에 띄우는 詩
  • 양병호
  • 승인 2012.12.23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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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또다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이다. 하늘은 눈이 곧 쏟아질 것 같은 표정이다. 그 하늘 아래 겨울나무들이 오소소 떨고 있다. 아니 온몸으로 겨울을 견디고 있다. 전력투구하여 지상의 칼바람과 맞서고 있다. 쓸쓸하고 또 쓸쓸하다. 외롭고 또 외롭다. 거침없이 부는 겨울바람은 인생 자체가 그런 것이라고 속삭인다. 세밑을 맞아 외로운 그대에게 더욱 외로워지라고 외로운 시 한 수 띄운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이 시는 눈 내리는 겨울밤 사랑의 고귀한 상념을 순백의 서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사랑을 완성하는 데에는 언제나 지불해야할 필수 조건이 있다. 그것은 극복해야 할 일정한 장애이다. 허들을 넘는 장애물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사랑은 앞에 놓인 장애를 건너뛰어야만 결승선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시에 드러난 사랑의 장애물은 ‘가난’과 ‘세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시인은 생각한다. 오늘밤 눈이 내리는 까닭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자연 현상을 사랑의 결과로 이해하는 시인의 상상력으로 인해 이 시의 눈 내리는 세계는 화평한 공간으로 변화한다.

비록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쏘시개 되어 눈이 푹푹 날리는 세상의 귀퉁이에 쓸쓸히 앉아 술을 마시는 한 남자.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이 한 번쯤 겪어봤음직한 장면이 아니던가. 쓰러지는 술병 따라 한숨과 열망의 소주잔은 높아만 가고. 그리하고도 사랑의 갈증은 도대체 가시질 않았었지. 그러나 이슬 맺힌 취객의 눈으로 바라보는 저 하늘의 별/나타샤는 물을 머금은 채 영롱히 반짝거리기만 한다. 그녀/나타샤를 향한 그리움의 키높이 만큼 어둠이 벅차오르는 세상은 언제나 억울하기만 했다. 그 따뜻한 사랑의 추억이 ‘나’를 지금의 여기까지 밀고 왔던 연료였으리라. 아니 앞으로 ‘나’를 밀고 가는 영원한 탈것이 아닌가 확신한다.

인적 끊긴 산골의 저녁에 눈은 근심처럼 하염없이 내려 쌓이고, 시인은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축복처럼 내리는 눈을 맞으며 ‘흰 당나귀 타고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상과 단절되어도 사랑만 있으면 견딜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세상과의 의도적 단절을 통해 둘만의 사랑의 집중도를 강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기다리는 나타샤는 오지 않는다. 하여 시인은 상념과 환상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시인은 세상을 버리는 대신 얻는 사랑을 꿈꾸고 있다. 아아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해보지 않았던가. 세상이 장애가 되는 사랑. 불륜이라 해도 반칙이라 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 윤리와 충돌을 일으키는 쓸쓸한 사랑. 그런 비극적이지만 흰 눈처럼 순백으로 빛나는 사랑. 세상을 벗어나고픈 사랑.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랑. 그런 사랑을 위하여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라고 애써 환청을 기다리는 사람이여. 쓸쓸한 사람이여. 더욱 아프고, 한층 고뇌하고, 이윽고 술 마시기를.

양병호<시인/전북대 인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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