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433>사내의 눈이 번들거렸다
가루지기 <433>사내의 눈이 번들거렸다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2.12.18 16: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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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견례 <4>

"허허허, 내가 본깨 사내다운 사내는 하나도 없구만, 즈그 마누래 구름 한번 태우지 못헐 병신 알자리겉은 사내들이구만, 약허디 약헌 계집이라고, 눈 한번 부릎 뜨면 논문서 내놀중 알고 겁얼 주었당가? 아, 쥑일라면 쥑여보랑깨요."

옹녀 년의 목소리가 지붕을 울리고 담을 넘자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손에 몽둥이도 들지 않고 아까부터 한 마디 말도 없이 돌아가는 꼴을 지켜만 보고 있던 사내였다.

"따는 저 여자 말이 옳구먼. 성님이 복상사를 당허신 것이 어디 저 여자의 잘못이겄는가? 타고 난 명줄이 그 백이 안 된 것을. 저 여자는 장례를 치루고 나서 닥달허기로 허고 우선 장례모실 준비나 허세."

"그럽시다. 대정 성님 말이 옳구만요. 고인을 안방에 두고 이러쿵저러쿵 분란을 맹그는 것도 사람의 도리는 아닌깨요."

다른 사내의 말에 마당에 모여있던 사내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섭섭이네가 이천수의 마누라를 안방으로 부축하여 들어갔다.

옹녀 년이 어찌할꼬, 이 일을 어찌할꼬, 차라리 이대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을까, 어쩔까를 궁리하며 별채의 쪽문을 막 들어서는데, 조금 전에 여자는 장례나 끝내고 닥달하자던 사내가 쪽문 옆 매화나무그늘에 서 있었다.

"아심찬허요. 꼼짝없이 몽뎅이로 맞아 죽을 이년얼 구해주어서요."

한 눈에 그 사내를 알아 본 옹녀가 실상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사내가 어찌 나오는가 보자는 심사로 치하를 했다.

"내가 고마울 것이 멋이당가? 자네가 곤욕얼 치룰뻔했구만. 사람들이 황망중에 정신이 없어 헌 소리들인깨, 자네가 이해허소."

대정성님이라고 불린 사내가 점잖게 대꾸했다.

"시방이사 무사했지만, 장례가 끝나면 꼼짝없이 맞아뒈질 목심이 아니요. 저녁에사 이녁덕에 괜찮앴지만, 꼼짝없이 뒈질 목심이 아니요."

"그렇게사 되겄는가? 막말로 자네가 잘못헌 것이 멋이당가? 씨받이로 들어온 것이 잘못인가? 씨받자고 옷 벗기는 성님을 거절허지 않은 것이 잘못이랑가? 이것은 순전히 천수 성님의 명이 짧아서 생긴 일이 아니든가? 자네 하나 감당허지 못헌 그 양반의 허약헌 몸이 잘못이 아닌가? 걱정허지 마소. 내가 지켜줄 것인깨, 자넬랑은 당최 걱정허덜 마소. 그 양반의 아랫도리가 허약헌 것은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운봉 인월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깨, 자넬랑은 걱정허덜 마소."

말끝에 사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담너머 마당에서 횃불 몇 개가 타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먼동도 트지 않은 캄캄한 새벽이었다.

어른거리는 불빛 속에서 사내의 눈이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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