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431>또 사내 하나를 잡아 묵었구나
가루지기 <431>또 사내 하나를 잡아 묵었구나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2.12.17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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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견례 <2>

 

그러나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 끝은 천길 벼랑이라는 것을 모를 옹년 년 또한 아니었다.

"성수씨, 우선 성님이 저 년한테 주었다는 논문서부텀 되찾읍시다."

이천수를 성님이라고 부른 호리낭창한 체격에 눈알을 슬슬 굴리는 폼이 막상 제 처지가 곤란하게 되면 제일 먼저 줄행랑을 놓을 것 같은 사내가 몸둥이를 빙빙 돌리면서 옹녀 년의 머리칼 한 움큼 뽑아들고 앉아 나는 못 살아, 나는 못 살아,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 이천수의 마누라를 꼬드기고 나왔다.

"논문서 뿐이겄는가? 입고 있는 옷도 싹 벳겨 쫓아뿌러야허능구만."

다른 문중 사내가 한 마디 거들고 나왔다.

그 말에 옹녀가 정신을 퍼뜩 차려 헝클어진 머리부터 추스리고 마당의 문중 사내들을 내려다 보았다. 자기들하고는 손끝 한 번 스친 인연도 없었고, 쓰디 쓴 탁배기 한 잔 얻어 마신 일도 없건만, 어찌어찌 말품이라도 팔아주면 이천수의 마누라한테 논 한 마지기라도 더 소작 얻을까하여, 몸둥이 들고 설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 사내들의 꼴을 가만히 내려다보자 옹녀 년의 머리 속으로 내가 이럴 때가 아니제, 까딱 잘못허면 이부자가 죽은 덤테기를 꼼짝못허고 쓰고 말 것구만이,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이천수 놈이 숨줄을 놓는 그 순간에야 내가 또 사내 하나를 잡아 묵었구나, 하는 경황중에 머리채도 잡혀주고 욕이란 욕은 다 받아 먹었지만, 자칫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 천길벼랑이라는 깨달음에 눈쌀이 먼저 알고 꼿꼿이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나마 선금으로 받은 논 열마지기 문서를 빼앗기고 몽둥이 찜질에 허리병신이 된 채 사내 잡아 묵은 년이라는 너울까지 쓰고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옹년 년의 머리 속에 서리가 내렸다.

천하의 잡년 옹녀 년이 아닌가? 몸둥이 하나로 충청도에서 전라도 지리산골까지 흘러 온 옹녀 년이었다. 호락호락 당할 수는 없었다. 죽을 때 죽드래도 짹소리는 하고 죽어야 했다.

눈에 불을 켠 채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문중 사내들 앞에 옹녀 년이 죽을 각오로 눈 몇 번 감았다가 뚝 부릎 뜬 채 허리에 두 손 걸치고 당당하게 마주섰다.

"나를 쥑일라면 쥑여보씨요. 내 죄가 먼 죄요? 내가 죽어야헐 죄가 멋이요? 운봉 삼거리 주막의 주모헌테 물어보씨요. 싫다고 싫다고 허는 나를 억지로 들여앉힌 사람이 누군가 알아보씨요. 논문서 ?기고 가마보냄서 싫다는 이 년얼 이 집꺼정 데리고 온 것이 누군가 알아보씨요."

살기등등한 사내들이 무서웠지만, 에라이, 이놈의 인생, 한 번 죽제 두 번 죽냐, 하고 나서자 나중에는 옹녀 년의 목청이 집안을 크렁크렁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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