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404>죽여라, 이놈아
가루지기 <404>죽여라, 이놈아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2.11.2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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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물의 수난 <54>

그리 작정한 강쇠 놈이 어둠을 밟으며 다리께로 걸어갔다. 혹시나 싶어 다리 아래 내를 흘끔거려 보았지만, 빨래하는 아낙은 없었다.

다리 난간에 서서 내려다 보며 진즉부터 마렵던 소피를 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냇가 근처에는 허름한 집 세 채가 있었고, 스무남은 걸음 떨어진 곳에 집 한 채가 외따로 있었다. 그 네 집 가운데 한 집이라고 강쇠 놈은 짐작했다.

다리 밑까지 빨래를 오기에는 다른 집들은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빨래터가 거기 밖에 없다면 모를까, 무거운 빨래 함지박을 이고 그 먼 곳까지 올 일은 없을 것이었다.

소피를 보고 거시기 놈을 탈탈 털어 제 자리에 넣은 강쇠 놈이 우선은 사립 밖에서 염탐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그 중의 한 집 앞으로 갔다.

저녁이라도 먹는듯 몇 사람의 그림자가 창호지에 비쳤다.

'이 집은 아니구만. 아낙 혼자 산다고 했는디, 사람이 저리 여럿인 걸 본깨.'

강쇠 놈이 씩 웃으며 다음 집으로 갔다. 그 집에서는 아랫채에 소마구가 있었는데, 주인 사내가 막 소에게 여물을 먹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두 번 볼 것도 없이 돌아선 강쇠 놈이 세 번째 집으로 가서 사립 안을 기웃거릴 때였다. 안에서 느닷없이 여인네의 악다구니 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여라, 이놈아. 죽여라, 이놈아. 허구헌날 술만 쳐묵고 사람얼 개패듯 패니 나도 인자 더는 못 살겄다. 죽여라, 이놈아."

가만히 들어보니 칼로 물베기 시합이라도 벌어진 모양이었다. 아낙의 목소리는 담을 넘어왔으나 사내는 무어라고 웅얼거릴 뿐, 제대로 대꾸도 못 하고 있었다.

'흐흐, 저 여편네가 어디가 단단히 고픈갑구만.'

강쇠 놈이 중얼거렸다. 아낙의 목소가 담을 넘어올 때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사내의 아랫도리가 부실하여 살방아를 제대로 못 찧어준다든지, 아니면 아낙의 기가 세어 사내를 깔아뭉개고 살고 있기 십상이었다.

그 집 아낙의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섞인 걸로 보아 사내의 아랫도리 탓이 분명했다. 사내가 사나흘에 한번씩 살몽둥이로 작신작신 두드려준다면 계집의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일 일은 없는 것이었다.

'흐, 저녁내 싸우던지 말던지.'

강쇠 놈이 중얼거리며 막 외따로 떨어진 집으로 발길을 돌렸을 때였다. 그 집에서 아낙 하나가 빨래 함지박을 옆구리에 끼고 사립을 나오고 있었다. 어둠 속이고 멀리 떨어져 확실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정사령 놈의 아낙이라는 직감이 왔다.

강쇠 놈이 얼른 담벼락 밑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아낙은 제 집 앞도 냇가이고 빨래터가 있건만 기어코 다리 밑까지 갈요량인지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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