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 나홀로 사물놀이패 ­ 유춘수 옹
유일 나홀로 사물놀이패 ­ 유춘수 옹
  • 송민애기자
  • 승인 2012.11.25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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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년의 열정으로 꿈과 희망을 일구어나가는 ‘나홀로 사물놀이꾼’ 유춘수(74) 옹.

누군가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 아니라 늙음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보다 나이 듦에 더 두려움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찬란한 청춘을 보낼 때의 무력감과 상실감은 서글플 뿐만 아니라 때로는 두렵다. 그러나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생의 불변의 법칙.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가는 세월의 흔적을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성숙한 열정으로 자신의 존재를 완성해나가는 단계의 한 과정인 까닭이다.

여기, 인생의 황혼길에서 제2의 청춘을 꽃피우는 이가 있다. 노년의 열정으로 꿈과 희망을 일구어나가는 ‘나 홀로 사물놀이꾼’ 유춘수(74) 옹이다.

여든을 앞둔 나이, 하지만 그에게 삶이란 여전히 기쁨과 행복의 화수분이다. 그의 삶의 동력은 바로 흥겨운 가락이 제 맛인 ‘사물놀이’. 지난 2003년부터 북과 꽹과리 그리고 징과 장구로 구성된 ‘1인 사물놀이 악기’를 직접 발명, 혼자서 네 명의 역할을 도맡으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의 긍정의 에너지는 흥겨운 사물놀이 가락을 타고 전국 시민들에게 기쁨과 행복의 웃음을 선사한다.

“제 나이 일흔하고도 넷이나 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젊은 사람들 못지 않게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죠. 한 달에 적어도 두세 번 많으면 대여섯 번은 복지관 봉사활동이나 행사 등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전달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이 들어 쓸쓸하거나 외롭다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죠. 그래서인지 저는 오히려 요즘이 더욱 설레고 즐겁습니다.”

이처럼 ‘나 홀로 사물놀이’로 청춘 못지 않은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유춘수 옹. 하지만, 그가 사물놀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불과 25년여 전의 일이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대한 끼와 재능이 넘쳤던 그이지만 생계조차 유지하기 힘든 시절 음악을 꿈꾼다는 것은 커다란 사치였던 탓이다.

“본래 고향은 전주 옆에 위치한 이서예요. 그런데 너무나 먹고 살기가 힘들어 스무 살 넘어서 전주로 이사를 왔죠. 그때는 굶기를 정말 밥을 먹듯 했으니까요. 전주로 이사하고 결혼한 후에는 열두 명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느라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사치가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

누군가에게는 찬란했을 인생의 봄날이, 그에게는 시리고 시린 혹독한 겨울과 같았다. 허나 꿈은 꾸는 자만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법. 음악에 대한 열정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마흔여덟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꿈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설 국악학원에 등록해 정식으로 민요를 배웠고, 자신감이 생긴 이후로는 전북도립국악원에서 판소리, 고법, 풍물 등 다양한 국악 장르를 섭렵해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도립국악원에서는 홍정택, 이성근, 나금추 등 전북 국악계의 거목들에게서 수업을 받으며 탄탄한 실력을 갖춰나갔다.

그 중에서도 호남우도농악의 최고 여성 상쇠인 나금추 명인에게 정식으로 농악을 전수받은 이후로는 풍물의 매력에 푹 빠져 지냈다. 이에 그는 1998년 농악에 대한 열정 가득한 몇몇 지인들과 함께 전주 한빛농악회를 창단해 그 끼와 실력을 펼쳤다. 이 같은 활동에 때로는 주위에서 “그 나이에 무엇을 새롭게 할 수 있겠느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중년의 나이에도 꿈을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때 한빛농악회 초대회장을 맡아 3년간 활동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국을 돌며 각종 행사에서 공연도 하고, 또 여러 대회에서 상도 탔어요. 그렇게 활동하다가 농악회가 자리를 잡으면서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줬죠. 가족, 회사, 나라 등 어느 조직이든 나이가 들면 후배들을 위해 자리를 내줄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한 번 풍물의 맛을 알게 되자 그 묘미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고안해낸 것이 바로 ‘나 홀로 사물놀이’다. 본래 사물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 4∼5명의 인원이 필요한데, 혼자서 1인 4역을 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수개월에 걸쳐 꽹과리와 북 그리고 장구와 징이 하나로 합쳐진 악기를 개발해는 데 성공했다.

유춘수 옹은 “혼자 사물놀이를 하려고 북과 꽹과리, 징, 장구를 한 악기처럼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이것을 만드는 일이 결코 쉽지 않더라. 완성하기까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뜯어고친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런데 문제는 또 다른 데 있었다. 비록 악기는 완성했지만 새로운 악기를 몸에 익히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 4-5명의 연주자들이 나눠 하던 연주를 혼자 다 해내기 위해서는 연습만이 답이었다. 호남우도농악을 직접 편곡해 한적한 다리 밑이나 공원 등지를 옮겨다니며 연습을 거듭하기를 수개월.

처음에는 시끄럽다고 시비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나, 차츰 시간이 지나자 연습하는 곳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신명 가득한 사물놀이를 혼자서 연주하니 사람들의 호응도 대단했다. 길거리 악사로 착각해 돈을 놓고 가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그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렇게 사람들에게서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자 방송국과 신문사 등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전국 각지에서 행사 요청이 끊이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에서 혼자 하는 사물놀이를 배우고 싶다며 찾아오기도 했다.

뒤늦게 시작한 사물놀이이지만 여러 대회에서 수상하며 그 실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2006년 전국고수대회 ‘노인부 대상’을 시작으로 김제지평선축제 ‘실버상’과 ‘특별상’, 2008년 세계타악기축제 ‘은상’과 2010년 세계타악기축제 ‘은상’ 등 그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맹활약을 펼쳤다.

“젊어서는 먹고 살기도 힘들었는데, 나이 들어 못다한 꿈을 이루고자 도전을 멈추지 않았더니 이렇게 좋은 일들만 생기네요. 뒤늦게 국악의 길에 들어섰지만, 저처럼 잘 활용하는 사람도 드물 거예요.(웃음) 정말이지 저는 지금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최근에는 복지관을 주로 다니며 봉사활동을 펼치는데 주력하고 있다. 흥겨운 사물놀이를 통해 외로운 노인들에게 조금이나마 기쁨과 위안을 선사하고 싶어서다.

“조금의 기력이 남아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사물놀이를 연주할 꺼예요. 제 연주로 사람들이 웃고 행복해진다면 끝까지 공연을 해야죠. 그것이 저의 기쁨이고 유일한 낙이니까요. 그리고 앞으로를 대비해 많은 이들에게 사물놀이를 전수, 전통음악을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황혼이 아름다운 이유는 태양이 저물기 전 온 힘을 다해 세상을 비춰서가 아닐까. 유춘수 옹의 지치지 않는 열정이 아름다운 이유 또한 마지막 사력을 다해 우리들의 가슴을 찬란하게 물들이기 때문일 테다.

◆ 유춘수 옹 걸어온 길

1939 전북 이서 출생

1965 국악을 배우기 시작

2006 제26회 전국고수대회 대상

2008 사천세계타악축제 창작타악부문 은상

2010 사천세계타악축제 일반부 은상

2012 제11회 짚풀공예공모전 장려상

 

 

 

송민애기자 say238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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