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397>눈에 물기가,색녀가 분명했다
가루지기<397>눈에 물기가,색녀가 분명했다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2.11.22 16: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 대물의 수난 <47>

"난 도무지 아짐씨의 말을 믿을 수가 없소. 세상에 어찌 사람 껏이 말 껏만이나 허겄소? 허풍이제요, 허풍."

가만히 들어보니, 이것은 제 놈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은 강쇠 놈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계시요? 주모 아짐씨 계시요?"

강쇠 놈이 큰 소리로 외치자 문이 열리고 주모가 얼굴을 기웃이 내밀었다.

"방 있소? 방 하나 주씨요."

강쇠 놈이 시치미를 뚝 떼고 다시 큰 소리로 외치자 주모가 입만 딱 벌린 채 말을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젊은 계집이 무슨 일인가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쇠 놈을 찬찬히 살폈다.

"아, 사람 구경 첨허요? 방 있소? 없소?"

"방이사 있제요만..."

주모가 마지못한 듯 몸을 일으켜 마루로 나왔다. 그런데 보니까 아직도 걸음걸이가 시원치 못했다. 어기적거리는 폼이 분명했다. 강쇠 놈이 썩을 년, 옹골지게 혼 한번 났구만, 하고 중얼거리는데 방에서 낯 선 계집이 하나 나왔다. 계집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강쇠 놈이 그대로 지나칠리가 없었다. 주막의 안방에서 나오는 계집이라면 술 팔고 웃음 파는 계집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믿고 위 아래로 찬찬히 살폈다. 계집 역시 낯선 사내를 낯가림도 없이 위 아래로 살피고 있었다.

강쇠와 계집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강쇠 놈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내의 혼을 쑥 빼 갈만큼 잘 생긴 계집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내의 눈빛을 당당히 마주받는 그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더구나 눈 밑에 검은 기운이 도는 것이랄지, 대번에 눈빛이 번들거리는 꼴이 색녀가 분명했다. 사내 앞에서 눈에 물기를 담는 계집치고 아랫도리가 허술하지 않은 계집은 없었다. 사내보다 먼저 가슴에 음심을 품고 있는 계집이 흔히 그런 눈치를 보였다. 그런 계집은 사내의 눈길 한번으로도 아랫도리가 젖기 마련이었다.

'저것이 사람이랴? 여우랴? 어째 이놈의 주막에는 여우년만 데려다 놓는구만. 흐기사 사내들의 전대럴 털라면 여우계집이 닥상이겄제. 헌디, 난생 첨 본 저 계집이 내 눈에 익으니 어쩐 일이까? 인연이 있을라고 그런가?'

강쇠 놈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몸을 돌려 뒷방쪽으로 걸어갔다. 그것도 어디가 어혈이 져도 단단히 진듯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주모년과 젊은 계집년을 마주한 순간 퍼뜩 머리 속을 흘러간 생각 때문이었다. 두 년들한테 자신이 운봉에 끌려가 얼마나 치도곤을 당했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야 계집들과의 다음 얘기가 술술 잘 풀릴 것이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