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382>웬 계집들이 떼로 쫓아왔으꼬이
가루지기 <382>웬 계집들이 떼로 쫓아왔으꼬이
  • 최정주 글,고현정 그림
  • 승인 2012.11.12 16: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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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대물의 수난 <32>

계집들한테 잡히면 살집에 갇혀 죽을 것이고, 사내들한테 잡히면 몽둥이에 맞아죽기 십상이었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고 또 도망을 쳤으나 늘 그 자리였다. 나를 두고 어디로 도망을 갈라고? 어림도 없제, 한 계집이 뒷덜미를 후려잡자 다른 계집이 바지가랑이를 나꾸어챘다.

날 두고는 못 가지. 날 두고는 못 가지. 계집들이 저고리를 벗기고 바지를 벗기고, 속도 없이 고개를 치켜든 거시기 놈을 향해 서로 자기 것이라고 아귀다툼을 벌이는데, 계집들의 등너머에서는 몽둥이를 든 사내들이 이 년 죽여라, 이 놈 죽여라, 눈에 살기를 띠고 노려보고 있었다.

"아, 안 되는구먼. 살려주씨요."

그 중에 키가 구척장신인 사내 하나가 부자집 서까래만한 몽둥이를 치켜드는 것을 보고 강쇠 놈이 고함을 버럭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세상은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 잠시 동안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분간이 안 된 강쇠 놈이 숨을 죽인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제일 먼저 비릿한 밤꽃냄새같은 것이 코끝에 맡아졌다.

그리고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여그가 시방 어디다냐? 설마 아수라 지옥언 아니겄제?'

아직도 비몽사몽간을 헤매는 강쇠 놈이 곰곰이 궁리에 잠길 때였다.

'안 되어, 안 되는구만. 나를 두고 가면 안 되는구먼.'

그런 중얼거림이 옆구리 쪽에서 들렸다. 그제서야 강쇠 놈은 자신이 화주에 취해 잠이 들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흐흐흐, 잡놈이 잡놈의 꿈만 꾸는구먼이. 웬 계집들이 떼로 쫓아왔으꼬이.'

입맛을 쩝 다시는데 잠이 들기 전에 주모와 질펀하게 살풀이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떻게든 주모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고, 주모의 손에 등떠밀려 주막을 나가야겠다고 작정했던 일도 떠올랐다. 주모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사령이 놈이 버티고 있는 운봉 땅에는 하루도 더 있기 싫었다.

"이보씨요, 아짐씨. 주모, 아짐씨. 목이 겁나게 마른디, 물 한 사발 떠다 줄라요?"

강쇠 놈이 발끝으로 주모의 옆구리를 쿡쿡 쥐어박으며 말했다. 그러나 주모의 대꾸는 없었다. 잠이 들어도 아주 깊이 든 것이 분명했다.

'흐흐흐, 흐기사 그리 지랄발광얼 떨었는디, 무사헐리가 없제. 아매 모르면 몰라도 한 나절언 꼼짝얼 못헐 걸.'

혼자 씩 웃은 강쇠 놈이 손으로 머리맡을 뒤적거려 옷가지들을 찾아냈다. 주모가 업어가도 모를만큼 깊은 잠에 빠졌다면 구태여 날이 밝기를 기다릴 일은 아니었다. 주모가 잠이 깨면 살품이나 한 번 더 팔아달라고 떼를 쓸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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