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
뫼비우스의 띠
  • 김인수
  • 승인 2012.11.0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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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물건은 안과 밖 또는 겉과 속을 구별할 수 있다. 겉과 속의 구별이 없는 것에 대해 알아보려면 먼저 뫼비우스 띠를 알아야 한다. 뫼비우스의 띠를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종이를 잘라 띠를 만든 후 그 띠를 한 번 꼬아서 붙이면 된다. 뫼비우스는 위상수학이란 고등수학의 분야에서 그의 연구, 특히 한쪽 면만을 가진 2차원 곡면인 뫼비우스 띠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뫼비우스는 뫼비우스의 띠를 어떻게 발견하게 됐을까?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뫼비우스가 해변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의 일이었다. 밤이 되자 그의 숙소에는 많은 수의 파리가 날아들었다. 그는 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양면에 접착제를 바른 띠를 구해왔다. 이 띠를 반 바퀴 돌려 띠의 양 끝을 서로 연결한 뒤에 묵고 있던 방의 기둥에 걸어 놓았다. 이 띠는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그날 밤 그는 파리의 방해 없이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뫼비우스는 파리가 잔뜩 붙어 있는 띠를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띠는 단 한 개의 면과 단 한 개의 모서리를 갖고 있었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오늘날의 뫼비우스 띠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이다.

뫼비우스는 1790년 11월 17일에 태어났으므로 2012년 11월 17일은 뫼비우스가 탄생한지 꼭 222년이 된다. 그는 독일 작센의 슐포르타에서 태어나 1809년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수학, 천문학,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그는 괴팅겐 대학에서 1813~1814년 가우스로부터 천문학을 배웠고, 할레 대학에서는 가우스의 스승인 파프로부터 수학을 배웠다. 그는 1815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인 ‘행성들의 엄폐 계산에 대하여’를 발표하며 이론천문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그 해부터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무급강사를 하게 된다. 그는 이외에도 순수천문학에 관한 천문학 법칙, 천체역학 원리 등 천문학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뫼비우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수학과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독일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몰바이데였다. 몰바이데는 처음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천문학 교수였다가 1816년에 수학과로 자리를 옮겼고, 뫼비우스가 그 뒤를 이어 천문학 및 고등 역학 조교수가 됐다. 뫼비우스는 2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천문학 및 고등 역학 조교수직을 얻었지만 오랫동안 정교수로 승진하지 못했다. 아마도 학생을 가르치는 재주는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학생들은 대학에서 교수의 강의를 선택해 수업료를 내고 강의를 들었다. 급료 역시 강의를 듣는 학생 수에 비례해 지불됐는데, 뫼비우스의 수업을 들으려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고 무료강좌까지 열어 학생들을 유치해야 했다. 1825년 몰바이데가 죽자, 뫼비우스는 그의 자리를 물려받아 수학과 교수로 옮겨가고 싶었지만 좌절된다. 그 이후 연구에 더욱 정진한 뫼비우스가 연구가로서 점점 명성을 얻게 되자 1844년 예나 대학에서 그를 초빙하려고 했다. 그러자 라이프치히 대학은 그때까지 조교수로 남아있던 그를 28년 만에 정교수로 승진시키며 남아주길 바랐다. 뫼비우스는 1846년 작센 왕립 과학회의 공동 창립자로 학회를 설립했고 1848년부터 1861년까지 라이프치히에 있는 천문대 대장을 역임했다.

수학에 관한 그의 논문은 대부분 기하학에 관한 것으로, 주로 독일의 수학 전문 학술지 크렐레(Crelle's Journal)에 실렸다. 그의 논문 대부분은 1827년 발표한 논문인 중력중심의 계산에서 주장했던 방법을 응용·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기하학적 변환과 동차좌표계에 관한 내용과 오늘날 ‘뫼비우스 넷’이라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기하학을 소개해 기하학의 새로운 발전을 이끌었다. 1837년에 발표한 정역학편람에서 정역학을 기하학으로 다뤄 점과 면의 영계와 공간의 선 체계를 이끌어내며 위상수학의 선구자가 됐다.

오늘날 그의 이름이 붙은 것으로 뫼비우스 함수, 뫼비우스 변환, 뫼비우스의 띠 등이 있다. 그 가운데 뫼비우스의 띠는 1858년에 발견했고, 이에 관한 논문을 프랑스 과학원에 제출했지만 논문은 그가 죽은 뒤에야 출판됐다.

1840년에 뫼비우스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시하였다. 옛날에 다섯 아들을 가진 한 왕이 있었다. 유언장에 그 왕은 그가 죽고 난후 그의 나라를 다섯 지역으로 나누되 다른 네 지역과 인접하도록 하라고 기술하였다. 유언장의 요구는 실행될 수 있을까? 답은 물론 할 수 없다! 이고 쉽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뫼비우스의 위상적 아이디어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오늘날 뫼비우스 띠로 알려진 이 수학적 대상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뫼비우스가 아니라 리스팅(Johann Benedict Listing)이다.

<이학박사, 호남수학회장, 대한수학회 부회장, 전북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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