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과 배움’이 있는 선택
‘물음과 배움’이 있는 선택
  • 이동희
  • 승인 2012.11.08 17:45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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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정도의 상용한자를 익힐 무렵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한자들이 많았다. 사람을 人間(인간)이라 표기하는데 왜 하필이면 사람 인(人) 옆에 사이 간(間)자를 쓰는 것일까? 귀신(鬼神)에는 왜 똑같은 뜻을 지닌 글자를 겹으로 쓰는 것일까? 학문이라면 마땅히 글자[文]를 통해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니 학문(學文)이라 써야 할 터인데, 왜 학문(學問)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런 말의 뜻을 터득하고 나서는 이런 궁금증이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었다고 후회하면서도 자신이 지닌 앎의 경박함에 분발심을 내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뒤 독서의 폭을 깊·넓게 하면서 그런 ‘쓸데없는’ 물음이 앎에 이르게 하고, 그런 ‘분발심’이 선한 삶을 선택하게 하는 배움이었음을 회상하는 것도 큰 보람이었다. 지금도 확신하건대 인생을 선순환 하느냐 악순환 시키느냐의 열쇠는 궁금증에 대한 물음과 배움의 자세에 있다고 본다.

고유어인 ‘사람’이 ‘人間’이 되기까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의미와 신학문의 도래라는 피치 못할 파랑이 개입하였을 것이다. ‘귀신’ 역시 ‘사람이 죽은 뒤에 남는다는 넋’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귀신이 사람에게 화(禍)와 복(福)을 안겨주는 신령’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鬼와 神’은 그 역할이 다른 정령의 합성어로 볼 수 있다. 본래 귀와 신은 다르다고 한다. “귀(鬼)는 사사스럽고 악한 마귀를 뜻하고, 신(神)은 공변되고 착한 영을 뜻한다.(『한국문화상징사전』83쪽)” 글자의 생김새로 보아도 鬼자는 神에 비하여 조금은 더 괴기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鬼는 보이지 않는 귀신이 보이는 귀신으로 옛 이야기에 자주 출현하는 도깨비의 상형문자이고, 神은 형성문자로 끝까지 보이지 않는 신령인 것만 보아도 그 역할이 다름을 짐작할 수 있다.

학문을 學問으로 쓰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앎에 철이 들면서다. 학문은 도구언어를 익히는 일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와 그 존재를 가능케 하는 원리를 탐구하는 일체의 행위다. 학문이 지식체계로서의 학문과 탐구활동으로서의 학문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규정을 전제한다면 기존의 지식체계를 탐구하는 것이나 그것을 통해서 새로운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는 일은 다르면서 같은 행위가 되어야 한다.

“문학(問學), 혹은 학문(學問)이 없는 선(善)은 선이 아니다.”(『도올의 아침놀』70쪽)는 명제를 접하면서 선입관과 고정관념 속에서 잠자고 있던 선성(善性)의 의미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선은 그 자체로서 고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 발현되는 과정이라거나, 선은 양심의 소리가 아니라 타인과의 교섭 속에서 더불어 형성된다는 것은 물음과 배움이 없이는 선한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이다.

필자가 진행하는 문예교실(전북노인복지관)의 문학 강좌를 수강하시는 분들은 주로 육칠십 대 노년층이다. 팔순을 넘기신 어른도 계신다. 이분들이 얻고자 하는 것 중 ‘늦깎이로 등단’하여 필명을 날리고 싶다는 뜻은 몇 순위 뒤에 두신 분들이다. 그저 지나온 삶에 대한 성찰과 여생에 대한 알뜰한 마무리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싶어한다. 즉 사람됨-인간다운 삶에 대한 선성을 갈무리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한 분들이다.

이는 지나온 삶에 대한 자성적 ‘물음’과 앞으로 전개될 여생에 대한 치열한 ‘배움’의 열정 없이 불가능하다. 삶의 자취란 고정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사라고 해서, 잊어버리고 싶다고 해서 삶의 발자취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자신에 대해서 묻고 대답을 찾아가는 배움을 통해서 죽은 과거를 살아 있는 현재로 만들 수 있다. 그런 실천이 곧 선한 삶이다. 선성을 지켜내는 길이다. 끊임없이 묻고 배움으로써 선성을 지켜 가려는 엄숙한 실천적 행위다. ‘노년수강’의 열정을 체득하면서 살아 숨 쉬는 선성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큰 보람이다.

묻고 배우는 과정에서 선한 길은 저절로 드러난다. 선은 가슴속에 숨겨둔 불변의 화석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 행위이기 때문이다.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선한 것을 선택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버릴 수 있는 안목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다. 묻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터득하는 인생학습의 결과다.

나쁜 과거에 대한 물음 없이 선한 오늘이나 향상된 내일의 배움을 얻을 수 없다. 나쁜 과거를 묻지 않는 양심은 화석일 뿐이다. 인생을 선순환 하려면 마땅히 나쁜 과거를 철저히 따져 묻고 선한 대답을 찾아내는 배움, 양심의 실천이 따라야 한다. 선의 속성이 그렇다.

이동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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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길수 2012-11-10 21:17:39
"물음과 배움이 있는 선택" 칼럼에서 물음과 배움이 없이는 선한 삶을 살수 없으며 선한 삶은 바로 실천에 있음을 말씀하신 이동희님의 글은 나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감동을 주신 글에 감사드립니다.
구 길수 2012-11-10 21:17:39
"물음과 배움이 있는 선택" 칼럼에서 물음과 배움이 없이는 선한 삶을 살수 없으며 선한 삶은 바로 실천에 있음을 말씀하신 이동희님의 글은 나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감동을 주신 글에 감사드립니다.
구 길수 2012-11-10 21:17:39
"물음과 배움이 있는 선택" 칼럼에서 물음과 배움이 없이는 선한 삶을 살수 없으며 선한 삶은 바로 실천에 있음을 말씀하신 이동희님의 글은 나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감동을 주신 글에 감사드립니다.
구 길수 2012-11-10 21:17:11
"물음과 배움이 있는 선택" 칼럼에서 물음과 배움이 없이는 선한 삶을 살수 없으며 선한 삶은 바로 실천에 있음을 말씀하신 이동희님의 글은 나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감동을 주신 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