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냄과 감춤의 미학
드러냄과 감춤의 미학
  • 조미애
  • 승인 2012.11.0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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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단풍 든 전북은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 여인의 치마폭처럼 흩날리는 가을날에는 노란 은행잎이 수북한 거리를 한없이 걷고 싶다. 혼자라도 좋고 마음 맞는 지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라면 마냥 행복할 것 같다. 다소 차갑지만 하지만 그래서 더욱 신선하게 느껴지는 바람속에서 이제야 그 색깔을 드러낸 초목들이 한없이 정겹고 평화로워 보인다. 지난여름 내내 푸르던 남천도 붉게 물들었다. 때가 되어 감추었던 홍조를 드러낸 가을남천이 선비의 모습인 양 고고하다.

드러냄과 감춤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살아가는 방법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많이 드러내 보여주기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지만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서는 드러냄과 감춤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귀곡선생은 이것을 ‘패합술’이라고 했다. 패?는 여는 것이요 합闔은 닫는 것이다. 열어서 드러내고 닫아서 감추는 것을 경우에 따라 적절히 한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노자, 장자, 공자, 맹자 등과 함께 이름을 날린 제자백가에 귀곡자가 있다.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춘추전국시대에 귀곡자의 사상은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생존의 지침이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소진과 장의, 손빈과 방연 등이 그의 제자다. 소진은 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 6국이 연합하여 강대국인 진秦에 대항해야 한다는 합종술로 강한 진나라가 약소한 작은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게 한 뛰어난 외교적 전략을 펼쳤으며, 소진이 죽은 후 장의는 이와 반대로 약소국이 연합하여 강대국을 섬겨야 한다는 연횡술로 합종을 깨고 진나라의 통일을 이루었다. 종횡학은 소진의 합종술合縱術과 장의의 연횡술連橫術을 말한다.

언젠가 한 지인으로부터 그들의 가족들은 만나면 서로가 장황하게 그동안의 일들을 서로 말하고자 하기 때문에 어느 순간 치고 들어가지 않으면 한마디도 못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왁자지껄하면서 화기애애한 그 집 풍경이 눈에 그려져 전해 듣는 사람들도 유쾌하고 흐뭇했다.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고 주장하여 드러내는 모든 경우에는 그 행위가 자연스럽고 대범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일부 TV토론의 양태는 상대방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주 치고 들어와 방해하면서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있어 왠지 볼썽사납고 불쾌하기까지 하다.

귀곡자는 말하고 싶으면 오히려 침묵하고 펼치고 싶으면 오히려 자제하라고 한다. 말을 하는 것도 전쟁과 같아서 전진할 줄만 알고 후퇴를 모르거나 싸울 줄만 알고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반드시 화를 입게 되어 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마치 비목어가 나란히 붙어서 움직이는 것처럼 거리가 없어야 하며, 상대방 말의 본뜻을 꿰뚫는 것은 소리와 그 메아리처럼 서로 일치해야 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은 빛과 그림자처럼 그 모양이 같아야 하며, 상대방의 말을 관찰하는 것은 자석이 바늘을 끌어당기는 것이나 뼈에 붙어 있는 고기를 혀로 핥는 것처럼 실수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경기는 회복되지 않고 살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척추동물 중에서 가장 하등한 무리인 물고기의 생존법을 통해 역경을 넘기는 지혜를 찾을 수 있다. 붕어나 잉어는 가뭄이 오면 뻘을 파고 들면서 그들이 서식할 곳을 찾아 몸을 숨기고 우기가 되면 다시 몸을 드러낸다. 어려운 시기에는 감춤으로 고비를 넘기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드러냄과 감춤을 조화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평정심을 갖춘 사람이다. 평정심은 수양과 도덕 그리고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귀한 인격이다. 더 먼 곳을 내다보고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 더 많은 것을 품을 수 있으며 사고는 훨씬 유연해질 것이다. 지난여름을 견디고 이제는 의연하게 서 있는 단풍 든 나무들처럼 기억은 더욱 새로워지고 감정은 세심해지며 정신이 맑아져 더 많은 것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가야할 길이 멀고 이루고 싶은 일이 많을 때일수록 자신을 감추고 부족한 공부로 드러낼 날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조 미 애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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