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속의 댓잎 소리
바람 속의 댓잎 소리
  • 김완순
  • 승인 2012.10.2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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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여행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역사 이래로 지위가 낮고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탈것을 탈 수 있는 입장이 아니거나 누군가에 의해서 걸어야만 했습니다. 특히 맨발로 걷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겸손과 순종의 상징일 수도 있었고 친근함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오래전부터 걷기는 가난과 열등함 내지는 저항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낡아서 거칠고 더러운 신발은 가난의 상징이었습니다.

깨끗한 신발에 말쑥한 차림으로 탈것을 쉽게 탈 수 있는 현대인은 어쩌면 모두다 고관대작高官大爵(?)입니다. 그중에서도 시간을 절약해야하는 사람들은 조금은 비싼 비용의 시속 300km를 달린다는 고속철도 KTX를 이용하게 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해 서대전을 지나 올 때까지 게임소리를 들어야하고 큰소리의 대화소리, 또 한편은 전화 통화를 도착지까지 계속하고 오는 사람. 듣고 싶지 않았지만, 워낙 긴 대화였기에 어깨너머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내용만으로도 줄거리 짐작할 수 있었고, 필자의 소견으로는 그리 복잡하거나 큰 일로 여겨지지 않는 개인적인 일, 회사 일로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죽이나 급하고 반갑고 무료하면 저럴까.’라고 상대방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판단을 지금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이 탈것을 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여행의 고통’입니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들어 차창 너머를 응시하면서 귀를 닫아 보았습니다. 초가을 들녘에 바람이 일고, 뒷동산의 대나무를 보면서, 불현듯이 청대(淸代) 이방응(李方膺)의 소상풍죽도(瀟湘風竹圖)의 댓잎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필자에게 ‘여행의 고통’을 없애 준 대나무 그림 한 점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합니다.

이방응은 강직한 성격으로 상사와 충돌하여 관직의 승강을 반복하다가, 사퇴한 후에는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꾸려나간 청대 중기의 화가이니까 약 300여 년 전의 그림입니다. 종이 위에 먹으로 그린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를 보면, 대나무와 괴석(怪石)이 화면의 왼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댓잎의 세찬 휘둘림으로 보아 아주 강한 바람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불고 있으며 오른편의 여백은 바람이 차지한 공간입니다. 앞쪽의 진한 먹으로 그려진 대나무는 가냘프고, 엷은 먹으로 처리된 뒤쪽의 대나무는 상대적으로 굵고 굳세어 보입니다. 바람 타고 가냘픈 줄기에 찰랑이는 앞의 대나무와 뒤에 듬직하게 우뚝 서있는 대비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앞쪽의 농묵 대나무는 평소에 군자인 척 하지만 큰 시련 앞에서는 이내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을 훈시하는 것이고, 뒤쪽 대나무의 두툼한 줄기는 굳은 심지를 일컬으며, 엷은 먹으로 원근법 처리한 것은 평소에는 앞서서 드러내지 않고 멀찍이 있지만 감내하기 힘든 시련 앞에서도 절개를 지키는 진정한 군자를 표현한 것입니다.

옛 그림은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사의화(寫意畵)입니다. 대나무 식물 하나 혹은 대나무 그림 하나를 그리고 감상하는 것은 덕성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가지고 이루어짐으로 사의라고 합니다. 수많은 문인 예술가들이 유가적 덕성을 전파하고 내면화하기 위해서 대나무 아름다움을 과분하게 칭송해 온 이유는, 그것의 구부러지지 않는 속성이 군자의 절개를 연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들의 의미 부여된 칭송이 어느덧 대나무를 자연 사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군자의 상징으로, 예술의 옷을 입은 미적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을 수신으로 이끌고 제가ㆍ치국ㆍ평천하로 인도할 수 있도록 고안한 미학적 방법론이 비덕(比德)입니다. 비덕은 천지만물의 형상을 통해서 인간 삶의 도덕적 가치와 정감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유가미학의 전형적인 창작론이며, 사물의 고유한 속성에서 군자의 면모를 발견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성을 통해 군자의 덕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장 자크 루소가 일찌감치 말했습니다. 열 살은 과자를 쫓고, 스무 살은 연인을, 서른 살은 쾌락을, 마흔 살은 야망을, 쉰 살은 욕심을 따라 움직인다고 합니다. 연로해도 지혜나 덕을 좇기가 어렵다는 뜻이겠지요. 그래도 나이 불문하고 기본적인 에티켓은 지켜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특히 이 좋은 계절에 기차를 탈 수 있음은 혼자만의 사색과 여유가 주는 행복감을 보너스로 받은 선물인데 그러한 소음으로 선물을 포기하게 됐다면 그 시간은 어땠을까요?

한번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김완순<교동아트센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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