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의 전설
올 가을의 전설
  • 이흥재
  • 승인 2012.10.17 1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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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의 가을은 벚나무 단풍부터 시작한다.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하늘거리고, 구절초가 외롭게 서있는 도립미술관 주변은 점점 붉게 물들어가며 가을의 전설이 시작된다. 지난 일요일 밤, 이번 전시 작품의 1차분이 수장고에 들어왔다. 행여나 전시 개막 전 날짜를 맞추지 못하고 작품이 늦게 도착할까 걱정했는데,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고 마음속에는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쳤다. 정말 전시가 열린다는 실감이 났고, 철판으로 완벽하게 포장된 작품을 해포하면서 개개 작품의 컨디션 체크를 할 때는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작품대여의 복잡한 절차를 비롯해 베네수엘라 대선 시기와 맞물려 전시가 계속 미뤄지면서 마음고생 한 것이 언제였는지도 모르게 애타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다.

세계미술거장전을 한다고 하면 많은 분들이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진다.

“진품이 오나요?”

“그럼요. 미술관에서 하는데 진품이 아닌 가짜면 큰일 나지요.” 하는 멘트가 여러 번 반복이 되었다. 전북지역 최초로 블록버스터 전시를 개최하기 때문일까? 많은 분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시는 반면, 과연 이 곳에 오리지널 작품이 걸리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나는 오히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세계미술거장전을 추진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분들과는 미술관에 작품이 도착해서 전시 준비 중이라고 하자 “관장님, 영화 도둑들 보셨죠? 보안을 철저히 잘하셔야겠네요.”

“예 그럼요 평소보다 몇 배나 더 철저하게 2중, 3중의 경비를 하고 있습니다.” 등의 대화가 오고가곤 한다. 우리는 지금 총 1000억 원대에 이르는 고가의 작품들의 손상과 도난을 방지하기위해 불철주야 철통경계에 들어갔다. 앞으로 전시가 끝날 때까지 4개월간은 긴장의 연속일 것이다.

‘나의 샤갈, 당신의 피카소’라는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번전시의 메인 작가는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이다. 피카소의 손길이 묻어나는 100호짜리 유화를 통해 피카소를 직접 만날 수 있다. 서울이나 해외여행을 가지 않고도 전북도립미술관에서 피카소와 샤갈, 마네, 세잔느, 몬드리안, 앤디워홀 등의 숨결과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전북미술사에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피카소는 1881년에 태어나 1973년까지 92년을 살았다. 피카소가 거의 1세기를 살다 생을 마감한 1973년은 내가 대학에 입학한 해이다. 소위 나는 73학번이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화가는 단연 파블로 피카소일 것이다. 어떤 평론가의 말에 의하면, 세계적인 화가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단 작품수가 1만점이 넘어야 하는데 피카소는 10만점의 작품이 남아있다고 한다. 당대에 유명작가로 성공하였고, 1946년 지중해 앙티브미술관장은 그에게 작업장소로 그리말다의 고성을 사용하도록 제안했다. 그는 이십대 전후에는 하루에 유화 3점을 그렸으며, 육·칠십대에도 매년 수백 점의 그림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단지 살아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생애는 곧 20세기 예술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 시대의 그 어떤 예술가도 그만한 영향력을 지닌 적이 없었으며, 한 작가에게서 그 만큼 많은 작품이 태어난 적도 없다. 끊임없는 창조력과 절박하고 기발한 시도들로 말년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에 몰두해 온 그에게 ‘시대를 읽는 천재화가’ 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이는 절대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의 많은 노력과 동료예술가들의 영향, 그리고 시대적 상황 등이 천재가 되기까지의 원동력이었다.

악필의 대가로 전북미술의 맥을 이어온 석전 황욱 선생님은 96세에 돌아가셨는데, 94세 까지 작품 활동을 하셨다고한다. 93세, 94세 때의 글씨를 보면 철철 넘치는 힘이 무한히 절제되어 부드럽게 느껴지는데, 문득 피카소가 만년에까지 작업을 한 것이 석전 선생님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보통 여든이 넘어간 노인들은 쇠약해진 몸을 추스르거나 건강을 염려하여 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피카소와 황욱 선생님은 아흔이 넘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작업에 대한 열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시대의 거장으로 남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가슴 졸이며 전시를 성사시키려 동분서주했던 지난 몇 개월간의 대장정은 막을 내렸지만, 이제 새로운 2막을 기다린다. 울며, 웃으며 열정을 다해 준비한 거장전의 대박을 기원하며, 올 가을 많은 이들에게 단풍이 곱게 물드는 모악산자락에서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이흥재 / 전북도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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