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다 행위예술 연출 심홍재 한국행위예술가협회장
최다 행위예술 연출 심홍재 한국행위예술가협회장
  • 김미진기자
  • 승인 2012.08.17 17: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심홍재 한국행위예술가협회장
행위예술의 시작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부터였다.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생활인가, 작가의 길인가 하는 두 갈래에서 방황하던 한 남자는 87년 전북예술회관에서 처음으로 퍼포먼스(Performance)’를 선보였다.

생을 마감하려 했던 못난 생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미술가의 길에 접어든 그는 “나의 업(業)이 이것이라면 내가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에 빠지게 됐고, 모든 작업의 명제를 ‘업’으로 다루면서 신인답지 않은 강렬한 이미지의 퍼포먼스로 주목받았다.

당시 선보였던 퍼포먼스는 두개의 비닐봉지에 싼 내장덩어리를 파헤치고, 칼로 찌르고, 질질 끌고 다니는 다소 불편해 보이는 작업이었다. 고깃덩어리 속에 감춰진 인간이 지닌 짐승의 성질을 끄집어 내 던지면서 ‘바로 너의 모습이야’라고 울부짖는 몸짓.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화들짝 놀라리만큼 어둡게 채색한 그는 지역 문화 판에 충격적인 인물로 떠오르기 충분했다.

신체의 움직임으로 말하는 예술. 국내·외를 넘나들며 설치미술과 평면회화로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는 심홍재(49) 작가에게 있어 ‘몸’은 ‘화구’다. 평면작업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상구인 셈. 평면과 설치, 행위가 삼위일체가 되는 순간에 그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도내에서 퍼포먼스라 하면, 심홍재라는 이름 석 자를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가 펼친 국내외 개인전과 단체전, 기획초대전을 통틀어 퍼포먼스를 선보이지 않았던 때가 손에 꼽을 정도인 것. 첫 퍼포먼스 작업 ‘업’부터 최근에 천착하고 있는 ‘베개이야기’까지 총 250여회의 전시를 치르는 동안 그는 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저의 몸은 예술 표현을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에요. 퍼포먼스를 펼쳐 보일 때 준비해야할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쇼(show)는 하지 말라는 것이죠.”

심 작가의 철학은 간단하다. 단순히 쇼킹한 것은 진짜 퍼포먼스가 아니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내면적으로 걸러내고, 고뇌하는 등의 철학적인 요소를 담은 무엇인 것. 표현방식에 있어서도 자아적이거나 혹은 캠페인적이고, 제 의식 집행자의 성격까지 다양성을 띄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 또한 개념 있는 행위라는 점이다.

그를 단연 최고의 행위예술가로 꼽는 이유는 따로 있다. 스물 다섯 해가 넘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의 퍼포먼스는 하나의 개인적인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닌, 시민 혹은 누군가와 끝없는 소통을 꾀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97년에는 동문거리에 퍼포먼스바 ‘내츄럴맵’의 문을 열고 시민들이 생소하게 느끼고 있는 퍼포먼스의 턱을 낮춰보고자 했다. 실험음악과 설치미술 등을 선보였던 이곳은 대안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심 작가는 2000년대에 들어서 보다 적극적인 활동에 나선다. ‘전주국제행위예술제’의 운영위원장을 맡아 매년 봄, 국내외의 다양한 퍼포먼스작가를 초대해 공연을 펼치면서 대중과 호흡하기 위해 앞장서왔다.

또 2006년에는 한국행위예술가협회 창립을 추진했다. 행위예술의 독립을 선언하고 나선 것으로, 짧은 역사 덕에 미술 분과에 소속됐던 행위예술이 독립 장르로서 홀로서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액션이었다. 산발적으로 움직였던 행위예술가들의 예술 활동의 저변확대와 후진양성을 위한 공식모임체로 위상을 찾기 위해 그는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작업방식을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한 것은 아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격포해수욕장에서 3일 동안 추위에 벌벌 떨면서 ‘설치와 행위의 만남’을 주제로 퍼포먼스를 펼쳐보이던 아들의 손을 붙잡고 “아야, 남들이 너를 미쳤다고 하니 그만 가자”고 눈시울을 붉혔던 어머니. 심지어 그림을 좀 그린다는 소위 예술가들 중에서도 그의 작업방식을 낯설어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포먼스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은 ‘젊음’이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열정’이라는 단어로 정리될 수 있다. 기껏해야 시골의 촌티(?)나는 행위예술가가 중앙의 안면도 없는 기자들에게 연락하는 용기 또한 ‘젊음’과 ‘열정’이라는 이상적인 조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이테가 늘어감에 따라 그의 작업 또한 더할 것은 더하고 빠질 것은 빠진 모습이다. 초창기에는 자신의 ‘업’을 주제로 했던 그의 작업은 이후 주변인의 추모의미를 담은 ‘슬픈서곡’, ‘상한영혼의노래’, ‘베게이야기’ 등으로 변화되기 시작, 끝없이 어둡기만 했던 초기의 작업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젊었을 때는 한 5년만 더 버텨보자, 또 5년만 더 해보자고, 끈을 놓지 못하다가 제가 평생 해야 할 소임이라고 마음에 와 닿았을 때, 큰 돈을 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겠구나 생각했죠. 일종의 달관이랄까요.”(웃음)

그의 인생의 반쪽을 함께한 행위예술에서 승승장구했던 순간은 언제일까. 지독히도 믿고 따랐던 형님, 고 하상용 추모제를 펼쳤던 지난 10년의 추억일까, 부산을 출발해 태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홍콩, 중국 등을 거쳐 60일 동안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2002년 일까.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어 보자면, 매 순간 순간 중요하지 않은 날이 왜 없겠는가마는 그가 수십 년을 한 곳만을 바라본 채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행위예술에 대한 지역사회의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숨이 턱 막히는 일이다.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다원예술축제 ‘수리수리, 전주’는 2번의 행사를 치르고 개점휴업상태이고, 강산이 변하는 세월을 이어온 ‘전주국제행위예술제’는 종잣돈을 마련하지 못해 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 했다. 긍정적인 엔돌핀 솟는 남자, 심홍재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최근 펼친 그의 개인전에서 또한 개념미술의 형태로 바뀌어갈 자신의 새로운 작업의 방향을 조심스럽게 펼쳐보였으니 말이다. 그는 오늘도 달리고 있다.

김미진기자 mjy308@

 

< 심홍재 프로필 >

- 개인전

제1회 초대전 ‘상황의식’전(나우 갤러리, 서울 1990)’을 포함해 총 11회

- 주요 설치 미술 개인전

‘에너지 공급--심장과 엔진’(전북예술회관, 전주 1999)

‘미술의 해’ 기념 ‘푸른산-맑은물 For the Green’ 전국순회공연(1995)

ICAroad-세계문화역사의길 만들기 1차 여정 참여 및 행사 코디네이터로 ‘세계의 베게체험’ 퍼포먼스 프로젝트 진행(2002)

러시아 한인 강제 이주 1세대 추모 퍼포먼스(사할린 코르사코프 망향의 언덕, 2007)

남, 북한 평화 통일을 염원하는 퍼포먼스(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광장, 프라하 킨스키 궁전 광장, 2008 / 캐나다 벤투머 에밀리카 대학, 2009)

한·중 현대미술교류전(중국대련신세계호텔특별전시관, 2010 / 전북도립미술관 2011)

외 국내외 단체전 및 기획초대전 약 250여회

- 현재

한국행위예술가협회장

다원예술축제 ‘수리수리, 전주’ 집행위원장

전주국제행위예술제 운영위원장

문화 보부상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