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유(臥遊)
와유(臥遊)
  • 이흥재
  • 승인 2012.08.08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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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더운 여름을 보냈을까? 옛 그림을 보면 소나무 아래서 흐르는 계곡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한없이 떨어지는 폭포를 보면서 더위를 잊기도 했다. 또한, 탁족도(濯足圖)라고 해서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계곡에 발만 담그고 있는 그림이 여러 점 전하는 걸로 보아 피서의 한 방법으로 탁족이 유행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정자에서 바둑을 두거나 시회(詩會)를 하며 피서를 했다.

‘와유’란 말이 있다. 와유(臥遊)는 누울 와(臥) 놀 유(遊)를 써서 ‘누워서 노닐다’란 뜻이다. 누워서 무얼 하면서 노닐까? 아마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워서 TV에 나오는 런던 올림픽의 감동적인 순간들을 보면서 노니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면 옛 사람들은 어떻게 ‘와유’를 했을까? 시원한 대청마루나 모정에 누워 그림 같은 풍경이나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읽으며 와유했을 것이다. 또 벽에 걸린 산수화 속의 폭포나 계곡을 보면서 마치 그 풍경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노닐었을 것이다. 원래 ‘와유’는 중국 남조의 송나라 사람 종병(宗炳)의 글에서 유래한 말이다.

“병들고 늙음이 함께 오니 명산(名山)을 두루 보기 어려울까 두렵구나, 오직 마음을 맑게 하고 도(道)를 관조하면서 와유(臥遊) 하리라”

장언원의 『역대명화기』 제6권 「송종병」편에 나오는 말이다. 누워서 산수화를 펼쳐보며 산수 유람을 간접체험 한다는 뜻이다. ‘와유’라는 말은 산수화의 의미를 강조하는 운치 있는 표현으로 중국과 조선의 화론(畵論)에 자주 쓰이는 말이다. 오랫동안 산수화의 제목이 되기도 하고, 산수기행문을 모은 책의 제목이 되곤 했다. 예를 들면 중국의 명·청대나 조선시대는 와유록(臥遊錄)이란 제목의 산수기행문이 여러 권 전해진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은 금강산 곳곳의 명소를 담아낸 산수화를 그렸고, 이를 모아 만든 수십 쪽의 그림책 즉 화첩(畵帖)을 여러 차례 펴냈다. 유람을 즐긴 문인들이 집에서 한 장씩 펼쳐보며 기행의 추억을 되살려 보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겸재 화첩을 들추며 유산(遊山)기록을 읽어본다면 우리도 조선 선비들의 와유를 누려볼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 가끔 앨범이나 디지털 파일로 저장된 기념사진을 들춰보며 여행 중의 추억이나 감회를 즐기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처럼 폭염이 쏟아질 때는, 정자에서 목침을 베고 귀청이 찢어지게 울어대는 쓰르라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즐기는 낮잠이 최고의 피서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오수(午睡)와 짝이 되는 와독(臥讀)이라는 게 있다. 누워서 노닐 때 그림만 보는 게 아니라 책을 보는 것 또한 격조 있는 ‘와유’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뒹굴뒹굴 방안에 누워 즐기는 와독이야 말로 최고의 피서며 여름나기가 아닐까? ‘와독’의 본질에 대해 중국의 임어당(林語堂)은 “기분 내키는 대로 손에 잡히는 책을 읽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읽을 수 있는 책 중에 미술과 예술 그리고 우리 문화와 관련된 책이 여러 권 있으면 훨씬 멋진 ‘와독’이 되리라 확신한다.

노성두·이주헌의 『명화읽기』는 느낌의 역사로서 서양화를 마주할 수 있는 책이고, 이주헌의 『서양화 자신 있게 보기』는 서양미술의 시대별 흐름이나 장르에 대해 술술 읽히면서 쉽고 재미있게 빠져들게 하는 책이다. 오주석이 쓴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나 『한국의 美 특강』은 옛 그림을 통해 우리 문화의 정체성과 정신성을 찾을 수 있는 정말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김봉렬의 『한국건축의 재발견』 1. 시대를 담는 그릇 2. 앎과 삶의 공간 3. 이 땅에 새겨진 정신 3권은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게 하고 재인식하게 하는 책이다. 중국 사람들의 금언이나 서양인의 격언은 많지만 우리 선조의 지혜를 모아놓은 책은 거의 없다. 정민 교수의 『죽비소리』 ‘나를 깨우는 문장 120’은 옛 선인들의 일침으로 우리 모두에게 죽비 같은 따끔함을 줄 것이다.

‘와유’라고 해서 꼭 누워서 노닐어야만 할까? 서서 노니는 것도 ‘와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서 노닐 수 있는 곳으로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갤러리가 최고이다. 전북 도립미술관 「山들바람」 전시를 봄은 이 시대의 또 하나의 ‘와유’가 될 수 있으리라. 김문철의 <내장춘설>은 봄기운이 완연한 날 살짝 내린 춘설의 내장산 정취를 맛볼 수 있다. 또 김문철의 지리산 수묵그림은 계절에 따라 시각에 따라 방향에 따라 형태와 색깔을 달리하면서 작가들에게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지리산 속으로 푹 빠져들게 한다. 장호의 <나는 눈-내변산>은 함박눈 펄펄 날리는 내소사 뒤 숲 속에서 헉헉거리며 겨울나무 사이를 걷게 만든다. 조헌의 <낮달이 뜬 울금바위>는 왠지 친근하다 못해 슬픔을 느끼게 하는 낮달과 만날 수 있다. 최근에 한 번이라도 낮달을 본적이 없는 분이라면, 미술관으로 서둘러 오시기를 적극 추천한다.

이흥재<전북도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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