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이 자랑스럽다
  • 조미애
  • 승인 2012.08.07 1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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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계속되고 있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잠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열대야 뿐 아니라 런던 올림픽에서 보여주고 있는 우리 젊은 선수들의 투혼 때문이다. 내리는 비에도 흔들리지 않고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여자 양궁 선수들의 모습은 큰 감동이었다. 자연에 몸을 맡긴 채 경기에 집중하는 선수들은 모두 인간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한 발에서 8점을 쏘아 무너지듯 실망하기도 하였으나 금메달을 확보한 것은 많은 젊은이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산 교훈이다.

때로는 오심으로 실격 당하고, 재심을 청구하여 값진 메달을 다시 얻기도 한다. 빈틈없는 수비로 승점을 얻기도 하고 상대 선수의 적극적인 수비에 한 점 골을 내지 못한 채 결승에 진출하기도 한다. 고의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는 판정에 눈물 흘리기도 하고 절대 강자였던 선수들이 예선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26개 종목에서 302개의 금메달을 놓고 기량을 다투는 205개 나라의 1만 6천여 명의 선수들은, 70억이 넘는 전 세계 사람들 인생의 축소판 그 자체다.

한 낮 무더위는 기승이지만 하늘은 이미 가을을 부르고 있다. 하늘은 넓고 점점 더 푸르다. 솔로몬의 칼에 새긴 문구가 생각난다. ‘이 순간 역시 지나가리라.’ 참을 수 없는 무더위도 견딜 수 없는 고통도, 슬픔도 순간처럼 지나갈 것이다. 화려한 영광도 뜨거운 갈채도 물론이다. 때로는 흥분하고 탄성을 지르고 안타까워 실망하기도 하고 야유를 보내다가 다시 찾아 온 기쁜 소식에 박수를 보내면서, 태극 선수들과 함께 한 이 여름도 이내 지나가리라. 하지만 가슴 벅찬 감동과 즐거움만은 함께 하였기에 오래도록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다.

완산칠봉에 커다랗게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창문 반쯤을 가릴 정도의 크기다. 산봉우리를 밀어내더니 이내 높이 오른다. 자전속도가 초당 4m정도로 그리 빠르지는 않는데 잠깐 사이에 45도 각도에서 밝게 빛을 낸다. 오늘 바라보면서 내가 반가워하는 달은 무심했던 어제도 그제도 떠올랐던 달이다.

올해는 베란다에서 상추를 재배하고 제법 몇 차례 수확도 했다. 오래전부터 집안에서 상추를 키워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 뜻을 이룬 것이다. 볕과

바람이 잘 통해서인지 곧은 줄기로 쑥쑥 자라서 머지않아 꽃을 피울 것 같다. 여섯 그루의 상추 줄기 끝에 모두 봉오리가 맺혔다. 상추꽃이 피기를 기다리다가는 문득 꽃이 피고나면 이제 곧 그의 생명도 다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멈춘다. 그러고 보면 꽃을 기다리는 것이 퍽이나 잔인한 일이다. 하지만 꽃을 피우는 것은 씨앗을 만드는 과정이니, 세상에 나왔다가 속절없이 지고 마는 것들도 많은데, 어차피 영원할 수 없는 생명이라면 씨앗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어릴 적에는 하찮았던 일들이 이처럼 소중한 기다림이 될 줄 몰랐다. 지난봄에는 화분에 나팔꽃 씨 하나를 심었는데 이내 싹이 나고 제법 잘 자라 주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바라 볼 수 있도록 창가에 옮겨 놓고 지지대를 세워 주었다. 즐겨 부르던 동요처럼 나팔꽃은 해님이 방긋 웃는 이른 아침이면 피었다. 아래층에서 피었다가 시들면 윗 층에서 피고 다음날은 그 위에서 다시 피기를 반복하더니, 먼저 피었다가 지고 난 자리에서 새끼 손톱만한 알맹이가 양파처럼 통통하게 씨를 만들었고 드디어 갈색으로 바뀌면서 나팔꽃 씨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직도 맨 위 줄기에서는 한 두 차례 꽃을 더 피울 것 같은데 어느새 까맣게 여문 씨앗을 남긴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좋은 것은 멀리 돌아가는 길을 통해 목적에 다다른다고 했다. 함께 침묵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런데 더 멋진 일은 함께 웃는 것이고, 두 사람 이상이 같은 체험을 하고 함께 감동하고 울고 웃으며 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도 멋진 일이라고 말한다.

올 여름 우리는 런던 올림픽으로 함께 웃고 함께 침묵했다. 그러는 동안 화려한 초록의 식물들은 폭염에도 초조해 하지 않고, 조바심 내지 않고, 아우성치지 않고, 고요함 속에서 가만히 인내하면서 씨앗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 조 미 애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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