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한말 의병은 항일 독립운동의 원동력
<완>한말 의병은 항일 독립운동의 원동력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8.0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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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이래 온 나라가 들끓으니, 모두 대나무를 꺾어 깃발을 내걸고 왜놈들을 죽이라고 소리쳤다. 관동지방에서 처음 시작해 곳곳에 메아리쳤는데, 인심이 차츰 분발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무기도 없고 기율도 없어 비록 천 명, 백 명씩 무리를 지었다 해도 왜군 수십 명만 만나면 달아났다. 어쩌다 한두 번 험한 지형에 의지해 저들의 빈틈을 찔러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적도 있었지만, 저들이 패한 사실을 깊이 숨겼으므로 그 소문이 멀리까지 미치지 않았다. 경북관찰사 신태휴가 민간의 서당을 금하고 신식 학교를 개설해 영을 어기는 자에게는 벌을 주었다. 백성들이 분하고 원동하게 여기며 ‘성학을 버리고 사교로 들어가게 한다’며 의병이 되는 자가 날로 많아졌다. 오직 전라남북도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 소문이 미치지 않아 기치를 세우고 맹세하는 자들이 없었다.

-황현의 ‘매천야록’ 1906년 기록 중에서

△해방이후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진 한말 의병정신

우리의 근대사는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국치를 당하는 고난과 시련의 역사다.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국난극복 운동이 있던 시기였다. 당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다. 한말 의병은 그런 일제의 총칼 앞에 제대로 된 무기조차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내놓고 결사 항전을 벌였다. 그러한 정신은 기나긴 국내외 항일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했고, 해방 이후 사대주의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으로까지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분단조국의 통일염원을 이룩하기 위해서도 이런 의병에 대한 연구와 의병정신 계승 작업은 계속돼야만 한다.

△병오창의는 전국 의병항쟁의 단초

의병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무력투쟁으로써 국권을 수호하려는 사람 또는 집단을 가리킨다. 단발령과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촉발된 을미의병(1895)이 짧은 기간 이어지다 마무리된 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들의 봉기가 전국 각지로 다시 확산된다. 하지만 호남지역은 동학농민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을미의병뿐만 아니라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반일의병을 조직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던 1906년 정읍 태인에서 전북지역 최초의 무력의병항쟁인 ‘병오창의’가 기치를 올린다.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병오창의는 호남지역 한말 의병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전국의 의병항쟁을 고조시킨 데에도 결정적 단초를 제공했다. 또한 상소 형태의 청원운동이 무력투쟁으로 전환했다는 점에서 후기의병의 방향을 제시해 준 것으로 주목받을 만하다.

△한말 의병사 재정립은 민족의 정체성과 직결

이번 기획은 바로 이 한말 의병투쟁에 있어 우리지역 태인에서 일어난 병오창의의 의의와 이를 주도한 최익현과 임병찬의 역할, 그리고 병오창의 이후 임병찬의 삶에 중점을 두고 있다. 본격적인 전북의병의 신호탄이 된 병오창의는 최익현이 주동이 됐지만 실질적인 준비는 임병찬이 있었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병찬은 이후에도 전국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는 등 일관되게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다. 바로 그 임병찬에 대한 연구가 너무 미진하고, 그에 대한 평가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동학과 의병,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구)한말의 역사적 사건을 한 줄로 엮어내야만 우리의 근현대사가 비로소 제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임병찬이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판단이 이번 기획을 이끌었다.

△임병찬의 저항 정신 재평가 필요

임병찬에 대한 저평가는 전반적으로 한말의병에 대한 연구 자체가 너무 답보상태에 있다는 점이 크겠지만, 김개남과의 악연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동학농민혁명 3대 우두머리 중 한 명인 김개남 장군을 밀고한 사건 이후 동학도들은 임병찬을 적으로 간주했고, 임병찬의 행위가 결국은 김개남을 잡으려던 일제를 도와준 형국이 되다보니 친일에 대한 논란마저도 있어온 것이다. 하지만 임병찬은 삶은 철저하게 일제에 저항하는 방향으로 정해져 있음을 볼 때 밀고를 하게 된 이유가 친일과는 무관함을 알 수 있었다. 그에 따라 ‘유림의 한계’라는 주장과 ‘고육지계’라는 의견을 이번 기획의 지면을 통해 개진함으로써 임병찬에 대한 오해를 일부나마 불식시키려고 노력했다.

△무지와 무관심속에 묻혀가는 한말의병사

본 기자는 이번 기획을 위해 1876년 조선이 최초로 외세에 문호를 개방한 강화도를 시작으로 면암 최익현과 돈헌 임병찬의 탄생지와 유배지 및 순절지, 그리고 이들이 주도한 병오창의 유적지 등을 꼼꼼히 돌아봤다. 이들 지역을 돌아보며 수없이 많은 무지와 무관심, 오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들이 모두 단식으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주장이었다.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5개월여 살다, 임병찬은 거문도에서 2년 가까이 살다 각각 순절한다. 그 기간 내내 단식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다만 이들이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단식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했던 이들의 단식투쟁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고, 오히려 그런 지나침이 이분들의 삶에 되레 누가 될까 두렵기도 하다. 이 모두는 아마도 이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한말 의병은 개항으로부터 경술국치까지 격동의 세월을 관통하고 있다. 의병을 알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 격동의 세월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 보다 많은 관심과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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