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 일제에 저항한 삶
한 평생 일제에 저항한 삶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7.23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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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이 영광군수에 부임하지 않자 왜놈들이 그를 체포해 서울 감옥으로 압송한 뒤 심문했다.

“그대가 벼슬하지 않는 것은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것인가?”

임병찬이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의병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오늘 할 수 있다면 오늘이라도 의병을 일으킬 것이고, 내일 할 수 있다면 내일이라도 일으킬 것이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거늘 너희가 어찌 묻는 것이냐?”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석방됐다.

-황현의 ‘매천야록’ 1908년 기록 중에서

◇혹독했던 대마도 구금

병오창의로 붙잡혀 구금생활에 들어간 임병찬은 대마도 생활 중에 종기로 몹시 고생했다. 매일같이 군의관이 치료를 해도 별스럽게 효과가 없었다. 또 거기에 피부병까지 걸려 가려움증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최익현의 병세가 악화됐을 때 임병찬은 스승을 따라 자결하려고도 했지만 “그대는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라”는 충고에 자결을 거뒀다.

그러다 최익현이 순절한 뒤 임병찬은 1907년 1월 대마도 억류생활에서 풀려났다. 그해 12월 하루는 서울의 이평해, 광주 김수창, 순창 김봉권과 양인영 및 채영찬, 김제의 조공삼 등이 찾아와 창의할 것을 의논했다. 이에 임병찬은 “여러분이 거의할 뜻이 같다면 꼭 먼저 병사들을 훈련해야 하고, 나와 남의 실정을 제대로 파악한 후에야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는 충고를 해 주었다. 그저 사람들만 모아놓는 것보다 군사훈련도 어느 정도는 받아야지,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수가 많다하더라도 그것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것임을 역설한 것이다.

임병찬은 1907년부터 1908년까지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08년 2월에 전주주재 일본수비대에 잡혀 간 일이 있었으나 곧바로 풀려났다. 영광군수에 제수되기도 했으나, 세 번 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아니했다. 그해 8월 23일 임병찬은 다시 천안의 일본헌병대에 붙잡혀갔다. 그들은 영광군수에 부임하지 않은 이유, 폭도(의병)들과 서로 연락이 있었는지의 여부 등을 심문하다 풀어줬다.

◇한일강제병합에 생병

그러던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 체결되자 임병찬은 울분을 참지 못해 생병이 나 병석에 누웠다. 그해 12월 11일 순창읍의 일본 헌병대장이 합방기념 일왕의 은사금 첩지를 전하려 찾아왔다. 이에 임병찬은 “나에게는 받을 수 없는 의가 있고, 일왕은 은혜를 베풀어서는 안 될 것이니 무엇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 뒤에도 계속 찾아와서 은사금 수령을 강요했으나 그때마다 “일왕이 찾아와서 권해도 나는 받지 않을 것이다”며 끝내 은사금을 물리쳤다.

1912년 11월 6일 대마도에서 함께 갇혀 있던 충청도 공주의 유생 이식이 찾아와 ‘비밀리에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라’는 고종황제의 밀서를 전했다. 1913년 2월에는 전 참판 이인순이 또 황제의 밀지를 받들고 찾아왔다. 나라를 다시 세워 일으키는데 진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1914년 2월에도 황제의 밀지가, 그해 4월에도 연거푸 밀지가 내려졌는데, 이때 임병찬의 지위는 ‘정이품 자헌대부 독립의군지사 사령총장’이었다.

이와 같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밀지를 받은 임병찬은 두 손자와 지인들을 통해 전라도 각 고을을 돌며 동지들을 포섭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914년 3월 19일 각 지역의 대표를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각 도 대표와 총 대표 27명에, 각 군 대표 302명을 합쳐 329명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였다. 이 무렵 임병찬은 호남의군부를 설치하고 그 맹주로써 거의할 것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원에서 체포된 동지 김창식이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백을 하고 말았다. 거사 준비단계에서 기밀이 탄로나면서 모든 계획은 중지되고 만다.

이에 따라 임병찬도 그해 7월 25일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된다. 이때 분함을 참지 못한 임병찬은 자결하기 위해 지니고 있던 칼로 자신의 목을 여섯 군데나 찔렀다. 하지만 상처만 입고 실패하자 굶어죽기로 결심하고 단식을 감행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일본은 곧바로 재판을 열어 1년 감금형을 선고하고, 거문도로 이송해버렸다.

◇거문도에서 한많은 생애마감

거문도는 임병찬과 인연이 깊은 곳인데, 28년 전인 1886년 진을 설치하기 위해 감독관으로 부임해 왔던 곳이기 때문이다. 8월 6일 거문도에 도착한 임병찬은 일본 경찰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려 했으나 잘못 찔러 뜻에 어긋났고, 굶어 죽으려고 오늘까지 14일을 굶었으나 몸만 야위어졌을 뿐 정신은 손상이 없으니 매우 이상한 일이요. 이것은 천명인가 싶소. 내 마땅히 천명을 기다릴 수밖에 없소.”하고는 밥을 먹었다.

거문도의 감금생활은 감옥이 아니고 주재소 옆에 딸린 민가의 방 하나를 빌려 기거했다.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가 가끔 찾아와 문안을 하고 갔으며, 때로는 문답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임병찬은 병에 걸려 1916년 6월 23일 거문도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66세였다. 그의 유해는 정읍시 산내면 종성의 본가로 돌아와 회문산 아래 남쪽 기슭에 묻혔다.

전북의병의 본격적인 신호탄이 된 1906년 6월 4일 병오창의는 최익현이 주동이 됐지만 실질적인 준비는 임병찬이 있었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병찬은 이후에도 일관되게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고, 그의 아들들도 모두 독립 운동에 가담해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전북의 한말 의병사를 논함에 있어 임병찬을 결코 과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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