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자하니 임병찬, 이식, 문석환, 신현두, 최상집, 이상두, 안항식, 유준근, 남규진, 신보균 등 10여명의 동지가 모두 흰 두건을 쓰고 통곡하며 잔을 올린 뒤, 영구를 옮겨 경비대 뒷문으로 나왔다. 9명의 동지들은 모두 통곡하며 문안에서 작별하고, 오직 임병찬과 두 아드님 영조, 영학 및 노병희 등이 영구를 모시고 해로옥에 이르자, 해로의 아들 웅야가 앞서 길을 인도해 수선사 법당에다가 영구를 모셨다 한다.”
최제학이 쓴 습제실기에는 최익현 유해가 1차적으로 수선사(修善寺)의 본당에 안치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수선사는 창건 당시 백제의 비구니승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어 한국과는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1907년 1월 4일 이곳에 안치됐던 유해는 다시 두 아들과 조선에서 온 여러 문하생에 의해 차가운 겨울 밤 대한해협을 건너 고국으로 돌아갔다. 대마도의 일본 경비대장은 이때 최익현의 아들 최영조에게 부의금으로 돈 백량을 전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고 전해진다.
수선사 경내에는 1986년 8월 3일 한일 양국 사람들이 힘을 모아 최익현의 순국 80주기를 기념하는 2m 높이의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를 세웠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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