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 대마도에서도 빛난 최익현의 기개
유배지 대마도에서도 빛난 최익현의 기개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7.16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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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 취조실에 들어서시자 저들의 이른바 대관이라는 자가 선생님을 향해 경례를 올렸는데 선생께서는 답례도 아니 하시고 크게 꾸짖으시기를 “네놈의 임금은 아비를 죽이고 대신 임금 자리에 섰고, 이등박문은 임금을 죽이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는데 이제 너 같은 졸무라기 두목들이 역적을 도와 잔학한 짓을 하니 모두 똑같은 무리일 것이다. 내 비록 옥안에서 죽을지라도 우리나라만은 반드시 너희 놈들 땅이 되지 않을 것이오. 만약 내 살아 나간다면 맹세코 다시 의병을 일으켜 네놈들을 무찌르리라”고 하셨다. 이어 목침을 들어 난간을 치고 붉은 책상보를 끌어당겨 땅에 내동댕이 쳐버리니 저들이 이른바 대관이라는 자가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뒤에 헌병을 시켜 감방에 단단히 가두라고 일렀다는 것이었다.

-최제학의 ‘습제실기’ 1906년 8월 10일자 일기 중에서


△대마도 유배

1906년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시작된 병오창의는 열흘 후인 14일 최후까지 현장에 남은 13명이 서울로 압송되면서 끝을 맺는다.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끌려간 이들은 정부 관료와의 연루설 및 고종의 밀지설과 관련해 집요한 추궁을 받았다. 습제실기에 의하면 임병찬과 이용길은 가혹한 형벌로 두 무릎이 마비돼 움직일 수 없었고, 유해용은 매의 독에 부스럼이 생겨 허벅살이 다 없어졌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가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 것도 입증되지 않자 8월 14일 군율위반죄를 적용해 최익현과 임병찬에게는 대마도 감금 각 3년과 2년, 고석진과 최제학은 군사령부 감금 4개월, 나머지에게는 태형 100대가 선고됐다. 다음날부터 일본 헌병들은 태형을 선고한 의사들에게 매질을 했다. 그 장면이 마치 칼로 살을 에는 듯해서 차마 눈으로 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 아프다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꺾이지 않은 한국인의 기개

최익현과 임병찬은 8월 27일 대마도의 이즈하라에 소재한 일본군 위수영으로 압송됐다. 도착하자 경비대장이 최익현에게 갓을 벗으라고 했다. 최익현이 거부하자 경비대장은 “일본의 밥을 먹을진대 마땅히 일본의 명령에 따라야 할 것이다. 갓을 벗으라 하면 벗을 것이요. 머리를 깎으라 하면 깎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뒤 최익현이 임병찬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본의 밥을 몇 숟갈 먹은 것은 망령된 일이었다. 그들의 밥을 먹으면서 그 영을 거역함은 또한 의리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일본의 밥은 먹지 않겠다”하고, 그날부터 단식을 감행했다. 이에 임병찬을 비롯해 호서지방에서 붙잡혀 함께 형을 살고 있던 다른 의병들도 함께 먹지 않았다.

이에 놀란 경비대장은 “공들의 식비는 한국에서 낸 것이고 일본과는 관계가 없으며, 머리를 깎으라는 말은 중간에 통역이 잘못돼 서로 의사소통에 오해가 있었던 것”이라며 “머리 깎고 복색을 변하는 일을 강제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고 식사를 들라”고 했다. 이때부터 비로소 모두가 식사를 다시 들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최익현은 식사를 정상적으로 하며 대마도에서 몇 달을 지내다, 12월에 들어 병이 들어 눕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온몸이 부어 있었고, 정신마저 혼미한 상태여서 지인들이 지극히 간병에 나섰으나, 마침내 1907년 1월 1일 새벽 4시에 운명하고 만다. 때에 그의 나이 74세였다.


△최익현의 순절

1월 5일 영구를 실은 일본배 약진환이 부산 초량앞바다 부두에 닻을 내리자 남녀노소와 계층을 불문하고 통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의 빈소가 차려진 부산의 상무사에서는 백수십 개의 만장이 하늘을 뒤덮었으며, 그를 추도하는 인파가 수만 명이나 몰려와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기생들까지도 언문으로 쓴 제문을 바치며 그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심을 기렸다. 심지어 청국의 직예총독 위안스카이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그를 추모하는 글을 보냈다.

부산 동래에서 떠나던 날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상여가 몇 차례나 움직이지 못했는데, 일본은 변이 날까 두려워하면서도 모이는 사람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나라가 시작된 이래 사람이 죽었다고 이처럼 슬퍼한 적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는 애도의 뜻도 비치지 않았으니, 일본에 붙은 관리들이 나랏일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항일 의병투쟁 횟불 병오창의

최익현이 순절한 뒤에도 임병찬의 억류생활은 계속됐다. 그러던 중 황태자(후에 순종)의 가례에 따른 특사령이 내려져 임병찬은 그 은전으로 귀가조치된다. 이로써 병오창의는 최익현의 순절과 임병찬의 석방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당시 병오창의에 참여했던 800여명의 애국의사들 중에는 각기 자기 고장으로 돌아가 항일구국 의병투쟁을 벌인 사람이 무수히 배출된다. 최익현은 비록 전장을 누비며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격동시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게끔 인도한 선도자였던 것이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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