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항쟁의 도화선, 병오창의
의병항쟁의 도화선, 병오창의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7.09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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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노생 익현은 삼가 각 도와 각 읍의 여러분께 격문으로 고하는 바이다. 아! 나라를 파는 역적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으리오마는 그 어느 것이 오늘날의 왜적과 같았겠는가. 많은 말이 필요 없다. 바로 의병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중략) 모든 우리 종실과 대신과 각 도의 방백과 각 군의 수령과 사농공상과 서리와 승려 모두가 한 때에 같이 힘을 합해 역적의 무리를 섬멸해 그 종자를 멸하고, 그 소굴을 소탕하고, 역당의 머리를 베어서 그 고기를 먹고, 놈들의 가죽을 깔고 자며, 우리의 국세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위험을 안정으로 바꿔 백성을 도탄에서 구원해야 한다. 오직 믿는 것은 군사를 일으킬 명분이 정대하니 적의 강함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을 감히 두루 고하니 성공하도록 함께 힘쓰자. 이와 같은 통문을 순천, 낙안, 흥양, 여수, 돌산, 광양, 장흥, 보성, 강진, 해남, 완동 등지에 보내노라.

-병오창의 5일 전 최익현이 용추사에서 작성한 격문 중에서

△무성서원에서의 창의

▲ 무성서원.최익현은 거사일로 정한 1906년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강회를 마치고 즉석에서 창의할 뜻을 밝힌다.
최익현은 거사 5일 전인 1906년5월 30일 전남 담양의 용추사로 가 전남지역 동지인 기우만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을 만났다. 이날 최익현은 격문을 각 고을에 돌리며 많은 애국의사들에게 창의를 호소하는 한편 동지들과 동맹록을 작성했다.

용추사에 돌아온 최익현은 거사일로 정한 6월 4일 예정대로 무성서원으로 가서 강회를 마치고 즉석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창의의 뜻을 밝히니 80여명이 이에 따랐다. 이때 임병찬은 미리 가재를 털어 병기를 수집하고 뜻을 같이하는 의사와 가동 100여명을 대동하고 있었다.

이들 180여명을 중심으로 대오를 편성한 뒤 곧바로 태인읍으로 들어가 태인향교를 근거지 삼아 무기를 거둬들였다. 이로써 호남지역에서 을사조약 이후 최초의 의병이 조직된 것이다.

이들은 의병 규모 확대를 위해 정읍, 순창, 옥과, 곡성, 담양 등지를 순회하며 의병세력의 확산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포수들의 전투능력을 높이 평가해 포수확보에 치중했다. 하지만 총을 가진 의병은 200~300명 정도였으며, 유생은 500명을 넘어섰다. 그리하여 의병대원은 봉기한 지 일주일 만에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군사훈련 등과 같은 군사작전이 필요한 경우에 주로 사찰을 이용했다. 이들이 머물렀던 사찰은 정읍 내장사와 순창의 구암사였다.

△최익현의 의병 해산 명령

6월 11일 의병진이 순창에 머무르고 있을 때 옥과군 동북면 방면에서 일본군이 포위망을 형성해오고 있다는 정찰보고가 들어왔다. 맹주인 최익현은 즉각적으로 맞서 싸우고자 하였지만 그들이 일본군이 아니라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로 구성된 우리나라 관군임을 알게 되자 주저하게 된다.

당시 의병들이 부딪친 가장 어려운 점은 관군과의 접전이었다. 의로운 의진의 행군을 막는 자는 모두 일인들의 앞잡이이므로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일인으로 간주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동족끼리 싸우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이에 글을 써 보내 물러날 것을 종용했지만 거부당했고, 결국 의진의 해산을 명령하게 된다. 의병들은 싸우고자 하였으나 최익현의 간곡한 만류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해산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100여명이 차마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을 때 진위대가 공격해 들어왔다. 탄환이 비오듯해 기왓장이 부서지고 벽이 무너졌지만, 아직까지도 22명이 남아 최익현을 호위하며 떠나지 않았다.

△순창 12의사

▲ 순창의병항일의적비.순창지역에서 활동한 병오창의군을 기념하는 비다. 순창객사 인근에 세워져 있다.
그러다 홀연히 탄환 한 알이 벽을 뚫고 들어와 정시해가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으면서 최익현을 보며 부르짖기를 “아직 왜놈 한 명도 죽이지 못한 채 죽게 되니 눈을 감지 못할 것이옵니다. 마땅히 사나운 귀신이 돼 선생님을 도와 왜놈을 다 죽일 것이옵니다”라고 하였다. 공격은 이날 밤 비바람이 몰아닥쳐 천둥번개가 칠 때에야 멈췄다. 이때가 되자 현장에는 최익현을 제외하곤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유종규, 조우식, 조영희, 라기덕, 이용길, 유해용, 최제학 등 12명만이 남았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순창의 12의사’라 부르고 있다.

관군은 사면으로 포위해 들어왔다. 이때 이들은 의연히 앉아 경전을 돌아가며 외우고 있다가 체포됐다. 6월 13일 일본의 고문관에 의해 심문이 있었고, 14일 전주 진위대와 일경에 의해 서울로 압송됐다.

△최익현과 임병찬의 대마도 감금

▲ 병오창의기적비.병오년(1906년)에 있었던 최익현과 임병찬이 주도한 의병운동을 기념하는 비다.
체포된 13명의 의병들은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끌려가 정부 관료와의 연루설 및 고종의 밀지설과 관련해 집요한 추궁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입증되지 않자 8월 14일 일본은 이들에게 군율위반죄를 적용해 최익현에게 대마도 감금 3년, 임병찬에게 대마도 감금 2년, 고석진과 최제학에게 군사령부 감금 4개월, 나머지에게는 태형 100대를 선고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8월 27일 대마도의 이즈하라에 소재한 일본군 위수영으로 압송됐다. 이곳에서도 최익현은 한국인의 꿋꿋한 기개를 보여주다 4개월여 지난 1907년 1월 1일 새벽에 74년의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임병찬은 후에 고국으로 살아 돌아온 뒤 절치부심하며 또 한 번의 항전을 준비한다.

단 열흘 만에 의병의 활동은 종식됐지만 병오창의는 호남지역의 의병투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전국의 의병항쟁을 고조시킨 데에도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이들의 움직임은 호남지역 중기의병을 선도했을뿐만 아니라 중후기의병의 활성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영구산 구암사]


▲ 구암사.
 순창군 복흥면에 있는 구암사(龜巖寺)는 백제 무왕 37년(서기 636년) 숭제선사에 의해 창건됐고, 1392년 태조 원년에 각운선사가 중창했다. 사찰 동편 지점에 숫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고, 대웅전 밑에는 암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암사라 칭했다고 한다.
구암사는 예로부터 유명한 대종사들이 주석했던 곳이다. 영조 때는 화엄종주인 설파대사가 주석했고, 이로부터 100여년 간 화엄종맥의 법손이 계승된 전통사찰이다. 당시 구암사는 전국 굴지의 사찰로, 각처에서 운집한 승려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국전쟁으로 전소돼 1957년 복원했지만 2년 뒤 다시 소실됐고, 1973년 일부 건물을 복구했으나 또다시 붕괴됐던 것을 2002년에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난 2000년 5월 구암사에서 월인석보(보물 제745-10호) 제15권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은 바 있다.
최익현과 임병찬의 주도로 거병한 의병부대는 태인과 정읍을 거쳐 6월 6일 지세가 험해 요새를 이루고 있던 구암사에 들어가 군막을 치고 하루를 유숙하게 된다. 이때 채영찬이 포수 수십명을 거느리고 의병진에 합류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들은 다음 날 새벽 빗속을 행군해 순창읍으로 들어가 일본과의 일전을 준비한다.

 

[태인 동헌]

▲ 태인동헌.
태인동헌은 조선시대 태인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청사다. 이 동헌은 조선 중종 때 태인현감이던 신잠이 세웠으며, 현존 건물은 순조 16년(1816)에 다시 세운 것이다. 건물 정면에는 고을을 편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청녕헌’(淸寧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전설에 따르면 전라감영의 선화당을 지은 목수가 3천냥의 비용으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해 지은 건물이라 한다. 이 동헌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동헌 중에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는 건물 가운데 하나다.
1906년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창의의 기치를 올린 의병진이 이날 대오를 정비한 뒤 동헌이 있는 태인 본읍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이때 군수 손병호는 소문을 듣자 항전은 엄두도 못 내고 도망쳐 버렸다. 따라서 의병진은 다툼 없이 태인성을 점령하게 됐고, 주민들을 불러 모아 오늘의 나라 형편을 소상히 설명하고 창의한 사실을 알렸다. 이어 최익현은 향교에 들어가 명륜당에 좌정하고 향장과 수서기를 불러 관아의 무기를 접수하게 하는 한편 일본정부에게 전하는 서한을 만들어 16가지 죄목을 들어 성토했다. 이때 김우섭이 몇 사람을 인솔하고 와서 의병을 지원함으로 즉석에서 받아들여 전력을 강화시켰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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