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나 우렁각시랑
그러면 나 우렁각시랑
  • 진동규
  • 승인 2012.07.0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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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공원에 갔다. 언젠가 명사십리(고창 상하)를 찾는데 입간판 하나가 시선을 붙들었던 것이다.

일행이 있어 그냥 지나쳐버린 것이 못내 아쉬워 다시 찾은 것이다. 누가 이렇게 멋진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바람공원, 낭만적이라고 말해버리기에는 조금 서운하고 지난날의 아련함으로 떠오르는 하얀 머플러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모래 언덕에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에 그걸 한 장씩 매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동호 해수욕장이라 부르고 있는 곳인데 옛날에는 동백정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작은 산이 동백숲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 저 만큼에서는 아담한 정자로 보였던가 보다. 소금 묻은 바람이 다듬어 놓았을 동백숲이다. 성깔 있는 갯바람은 조각가가 다 되어 작품을 또 어루만졌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숲을 정자라고 했을까.

우렁각시 하나 살았을 것이다. 더운 진지상 차려놓고 감쪽같이 숨어버리는 우렁각시가 살았을 것이다. 동백꽃같이 붉은 사람을 가꾸는 우렁각시, 진초록의 잎사귀마다 먼바다를 건너가는 은빛 그리움을 접었다가 펴고 접었다가 펴고 그랬을 것이 아닌가.

여기 와서 ‘동백정’이라는 시를 남기고 간 시인 한 분이 있다. 모두 학자로 추앙하는 분이신데 내게는 시인으로만 보인다.

동백정

자라머리 동백숲 찬란하게 붉어

잔 들고 숲 사이 흉금을 트네

장수의 영기 한 자락 놀라는 비취새

쇠젓대 몇 마디에 어룡이 춤추고

누런 띠밭 질펀한 골에 농사가 한창

푸른 안개 짙어 겹겹이 섬이 오네

지금 성대라 변방이 고요하니

수령이 잠깐 노니는 것 좋으리

간재 김종직 시인은 바다 건너 기벌포에 사셨다. 조선말의 어수선한 세상에 기벌포를 택하게 한 듯하다.

어딘가를 다녀오시다가 바람공원에 들르신 듯하다. 기벌포라는 곳이 바닷물이 빠질 때에나 잠깐 도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가까운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쉬웠을 것이다. 동백정포 동백꽃 그늘에서 잔을 기울이셨을 것이다. 뼛속까지 나라 걱정이신 시인이 나라 되어 가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쏜가.

선생께서 눈 지그시 건너다보시는 기벌포(지금의 개화도)는 당나라 소정방의 침입로였지 않은가. 힘겨웠던 전장의 모습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백강 전투를 끝으로 스러져 갔던 백제사를 되새겼는지도 모른다.

부하 장수에게 보내는 명령은 쇠피리나 북 깃발이 담당한다. 군기의 중앙에 누렁으로 용과 구름무늬가 있고 가장자리는 불꽃 모양이다. 좌우로 파랑과 흰 기가 또 있다.

‘쇠젓대 몇 마디에 어룡이 춤추고’ 쇠젓대 소리와 함께 대장의 군기가 춤을 추고 있다. ‘누런 띠밭 질펀한 곳에 농사가 한창’ 지금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어촌 풍경과 전장의 상황이 절묘하게 중첩되면서 효과를 내고 있다. 군더더기 한마디 없이 이끌어내는 솜씨라니.

바람은 흐르는 것이다. 쉬지 않고 흐른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아니 한순간의 순간도 해찰하는 법이 없다. 바다 위를 짚어가는 일이나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일이나 제가 지닌 숨결만큼의 모든 힘을 다해서 갈 뿐이다.

나는 바람의 숨소리를 들었다. 허망한 숨소리도 혀차는 소리도 들었다. 나뭇가지 사이를 빠져 나가가면서 한눈 찡긋하는 것이다. 작은 조약돌 하나 비켜 가면서 온몸을 상보 돌리듯 솟구치는 것도 보았다.

바람공원을 잘도 가꾸신 우리 바람공원 마을 어른들께 감사한다. 해당화길 길섶은 흰 해당화 간간이 섞어가며 정성을 다하신 것은 또 어떤가.

한 번은 만나고 싶었던 우렁각시를 오늘은 꼭 만나야겠다. 김종직 시인께 상 차려주고 숨어버린 것이야 매력이지만 동백숲 뒤에서 또 자꾸 뒤돌아보는 순정의 ‘봄날은 간다’가 아니던가. 선운사 동백 씨 한 움큼 챙겨다가 언덕배기에 꼭꼭 박아두면 동백정 다시 될 터인데 그러면 나 우렁각시랑 지금 성대라 변방이 고요하니 수령이 잠깐…….

진동규<시인/한국시인협회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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