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찬의 고뇌
임병찬의 고뇌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7.02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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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시절 돈헌 임병찬의 선택에 대한 갑론을박은 한 세기를 넘어서도 여전하다. 그의 행보가 고뇌에 찬 판단의 결과물이란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그렇지 않은 시각도 상존한다.

논란의 소지가 많은 김개남 고발사건도 그렇다. 임병찬이 김개남을 붙잡아 관아에 넘겼던 일에 대해 “김개남 한 사람 희생으로 여러 동학도들을 구하는 사전협의해 의한 고육지계”라는 주장과 “임병찬은 벼슬을 돈으로 산 사람이며, 공명심이 지나친 사람”이라는 등 그를 폄훼하는 이야기들도 전해진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에서 무남영 좌령관과 임실군수 제수 등 잇따른 입신양명의 기회를 제공했지만 모두 수용하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김개남과 관련해 수 없이 쏟아지는 폄훼의 발언들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개화기였던 당시 보수진영은 의병 창의에는 찬성했지만 급변하는 시대에 따른 개혁에는 반대했고, 진보진영은 시대 변화에 따른 개혁에는 찬성했지만 의병창의에는 반대했다. 하지만 임병찬은 보수진영이면서도 개혁적 성향을 띠고 있어 동학농민혁명의 사상과도 여러 측면에서 흡사한 접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 그가 동학농민혁명에는 가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삼두장군 중 한명인 김개남을 붙잡아 관아에 넘기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임병찬을 폄훼하는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그의 행보를 어느 일방으로만 판단하거나 해석하려 하는 것은 그의 사상에 대한 연구나 접근을 겉돌게 만들 수 있다. 그가 고뇌했던 시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당시는 격동의 개화기였다. 임병찬을 단순히 김개남의 반대편에 선 인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처음부터 국난에 대비해 일관되게 행동한, 국난 극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그런 생을 살다간 시대의 혁명투사로 기억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그가 머물렀던 산내면 종성리의 창의 유적지 역시 훗날의 백정기 의사의 투쟁 방식과 같은 소수정예 요원들을 길러 내던 호남 의병투쟁의 첫 시작지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용찬 정읍문화원 사무국장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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