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찬과 김개남의 각기 다른 세계관
임병찬과 김개남의 각기 다른 세계관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7.02 1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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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찬과 김개남 두 사람은 모두 우리 역사에서 애국지사로 기억되고 있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서로 알고 지내며, 똑같이 나라 사랑하는 길을 걷다, 일제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이들은 나라 사랑하는 방법에 있어 다른 길을 택했다. 한 사람은 동학, 또 한 사람은 의병.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힘을 합해 일본에 저항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다.

김개남은 1894년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의 주역이다.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겠다는 격문을 사방으로 보내며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다. 전주화약을 맺은 뒤에는 남원성을 중심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전라좌도를 평정한 후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강경파였던 그는 남원을 본거지로 우도의 금산, 무주, 진안, 장수, 용담을 비롯해 좌도를 호령했고, 순천에 영호도회소를 설치하고 대접주 김인배로 하여금 영남의 하동, 산청, 진주지역을 관장케 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이때 ‘영주’라는 본명을 “남쪽을 연다”는 뜻의 ‘개남’으로 바꿨다. 그러나 2차 기포 때 관군의 요충지인 청주병영을 공격하다 실패해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태인으로 내려와 매부 서영기 집에 숨어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때 인근에 살던 임병찬이 김개남을 불러들인 후 관하에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전라도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을 전주로 데려온 뒤 서울로 압송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중도에 탈주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1895년 1월 8일 전주 서문교회 옆 서교장터에서 임의로 참수하고 만다. 이후 김개남의 수급은 서울로 이송, 1월 20일 서소문 밖에 3일간 효시된 뒤 전주로 보내 다시 효시됐다. 김개남은 시신을 거두지 못해 무덤마저도 없었으나 1995년 그가 살았던 정읍 산외면 동곡리에 가묘와 묘비를 세웠다.

동학군이 진압된 후 정부에서는 논공행상으로 임병찬에게 무남영 좌령관과 임실군수를 연거푸 제수하지만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는다. 포상이 탐이 나 밀고한 것이라면 결코 마다할 이유가 없는 데도 말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됐건 이 사건을 계기로 임병찬의 임씨 집안과 김개남의 김씨 집안은 정읍이라는 한 지역에 터를 잡고 있으면서도 대를 이어 원수지간이 되고 만다. 그렇게 형성된 관계는 지금도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본질적으로 구국이라는 동일한 가치를 추구했던 동학과 의병을 동일선상에 두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 시점에서라도 이 부분에 대해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본다.

일본이 그렇게도 뒤쫓았던 김개남을 임병찬의 도움으로 붙잡게 된 것은 결과적으로 일본에 협조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임병찬의 삶이 일관되고 선명하게 일본을 몰아내는데 바쳐졌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왜 김개남을 밀고했을까.

당시 임병찬의 밀고가 악의적인 행위가 아니었다는 의견 중 현재 가장 설득력을 갖는 것은 ‘고육지계’와 ‘유림의 한계’라는 주장이다. 먼저, 이용찬 정읍문화원 사무국장의 기고문을 통해 평소 알고 지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나머지 동학도들을 구하기 위해 사전협의에 의해 스스로 붙잡히는 고육지책을 쓰게 됐다는 주장을 알아보기로 한다.

또한 동학 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조광환 (사)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전 이사장의 인터뷰를 통해 체제전복을 외치던 동학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을 밀고한 것은 나라의 주인에 대항해 일어선 역적을 타도하겠다는 그 나름대로의 충을 위한 신념에서였을 것이란 주장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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