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과 임병찬의 만남
최익현과 임병찬의 만남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6.25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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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찬창의유적지
▲ 임병찬묘비석

“이제 나라 형편을 살피건데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이 없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벼슬 지낸 어른이야 이렇게 있을 수 있겠소?”하자, 임병찬이 말하기를 “내 비록 이처럼 있으나 어찌 마음속에 충의로운 마음이 없으리오. 요즘 형편을 살피건데 사기가 줄어들어 능히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반드시 원로대신이 앞장을 서야 거사가 가능할 것이오. 원컨대 선생께서는 이 뜻을 최대감(최익현)께 전하고 그 답을 기다림이 어떠하겠소?”라고 하였다. 이때에 나는 소매 속에서 선생님의 편지를 꺼내 전한 즉, 임병찬이 이를 자세히 살펴 읽은 뒤 수락하기를 “어찌 감히 따르지 아니하리오”라고 하였다. 드디어 서로 속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왜적을 토멸하고 국권을 회복할 방책을 논의하기에까지 이르게 됐다.
-‘습재실기’ 중 최제학과 임병찬의 문답 중에서

△시묘를 핑계로 결사대 조직

1905년 임병찬의 나이 55세 되던 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아들과 조카들을 모아 놓고 “이제 나라 일이 위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지도 없고, 신식무기도 없으니 의병을 일으키는 일도 어렵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어 집상을 제대로 못한 것이 언제나 한이었다. 이제 이곳으로 어머니 장사를 모시고 그 묘 아래에서 시묘를 하며 산 아래로는 내려오지 않겠다”고 말한 뒤, 어머니 왕씨 부인의 무덤을 그가 살던 종석산 위로 옮기고 여막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였을 뿐이다. 임병찬은 당시 공공연히 어떤 행동을 드러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어머니의 묘를 옮겨 추상을 한다는 구실로 산속에 숨어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 마음속으로 계획하던 일을 계속 진행시키고 있었다.

임병찬이 기우만에게 보여준 상소의 초안에 따르면, 그는 소수의 인원으로 창의한다고 해도 승산이 없음을 알고 최후의 방법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일본의 동경으로 직행해 일본 고위 당국자와 담판함으로써 을사조약의 파기를 요구할 계획이었다. 만약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릴 것을 결심하고, 이 일을 실행하기 전 고종에게 상소해 그 뜻을 전하기 위해 상소의 초안을 잡아 놓았던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최익현과의 역사적 만남이 이뤄진다.

△호남을 선택한 최익현, 왜?

최익현은 제국주의 열강의 의도를 예견하는 상소를 거듭 올리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상소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결국 망국적인 치욕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제 더 이상 말과 글로는 작금의 상황이 타계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1906년 최익현은 결국 의병이라는 무장항일투쟁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때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추천된 사람이 바로 임병찬이다. 최익현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최제학이 “임병찬은 재주와 지혜가 있어 쓸 만한 인재”라며 천거한 것이다.

최익현은 호남으로 향하면서 “지금 우리는 군사가 훈련되지 못했고, 무기도 이롭지 못하니 반드시 각 도, 각 군의 세력을 합쳐야만 일이 이뤄질 것이니, 나는 마땅히 남으로 내려가 영호남을 일깨워 일으켜 호서지역과 협력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익현은 영남과 기호의 유생인 곽한일과 남규진에게도 각자의 근거지에서 의병을 일으키자고 권유했고, 화서학파의 동문인 유인석에게 남북에서 함께 호응하자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이를 볼 때 최익현은 뜻있는 인사들과 협력해 동시다발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전략을 구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만 일본의 강력한 군사력을 분산시킴으로써 효과적인 반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것 같다. 최익현이 지역적 기반과 연고가 거의 없는 호남으로 내려온 것도 의병의 연합전선을 구축해 일제의 군사력에 대응하려는 의도로 해석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역사적인 만남, 그리고 의기투합

최제학의 천거 후 수차례의 서신교환으로 서로의 뜻을 확인한 최익현은 드디어 1906년 3월 24일 임병찬을 찾아와 첫 대면을 하고, 임병찬은 곧바로 최익현을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올렸다. 이로부터 둘은 사제의 정의로 깊게 맺어져 최익현의 옆에는 언제나 임병찬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고, 일을 함에 있어서도 매사에 둘이 합의해 진행했다. 그러던 중 임병찬이 고종에게 올리려던 상소의 초안을 본 최익현이 곧바로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제시하자, 임병찬은 자신의 계획을 접고 최익현을 따르게 된다.

임병찬은 최익현의 위임을 받아 의진의 조직에 착수했다. 그는 군무를 총괄하며 의병모집과 군량비축, 군사훈련 등에 힘을 쏟았다. 또한 각지에 통문을 보내 동조자와 군수물자 등을 수집했고,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총기를 사용할 줄 아는 포수를 규합하는 데도 정성을 기울였다.

하지만 농사철이 다가온 데다 시일이 촉박해 병기와 군량이 충분히 준비되지 못했고, 임병찬은 결국 거병시기를 가을로 연기할 것을 건의한다. 하지만 최익현은 일의 성패와 상관없이 당장 강행하기를 원했고, 임병찬 등은 이 뜻을 받들어 마침내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역사적인 병오창의의 기치를 올리게 된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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