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의병장 임병찬
준비된 의병장 임병찬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6.18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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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찬 초상
선생님께서 종산으로 나가시어 병찬에게 묻기를 “경영코자 하는 일이 어찌 되느냐”고 하니, 병찬이 대답해 올리기를 “재정이 텅 빈데다 농사일마저 바쁘고, 군사모집 마저도 뜻대로 아니되오니 가을을 기다려 거사함이 어떨까 하옵니다” 했다. 선생님께 이 말을 들으시고 긴 한숨에 뜨거운 눈물을 가득히 머금으신 채로 말씀하시기를 “그대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이 늙은 몸이 집으로 돌아가 한가롭게 쉴 생각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셨다. 병찬이 울면서 아뢰기를 “선생님의 뜻이 정히 그러하시면 성패를 따지지 않고 동지를 불러 모아 죽기로 거사해 천하에 대의를 떨치는 것이 어떻겠나이까”라고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장하도다. 그대의 말이여. 이렇게 있을 일이 아니라 곧바로 일을 일으킴이 옳겠다”고 하셨다.

-최제학의 문집 ‘습재실기’ 중 윤 4월1일 문답 중에서

임병찬(林炳瓚)의 호는 돈헌(遯軒)이고, 본관은 평택이다. 그는 1851년 옥구현 서면 대사리, 지금의 상평리 남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는 조선말기의 세도정치의 폐습으로 부정부패가 극심하고, 정치 기강은 문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온 고을에서 신동이라고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17세 때인 1867년 아버지가 병상에 눕고 가정이 어려워지자 옥구현의 서리로 들어가 형방을 맡았다. 그 후 18세에는 예방과 공방을 지냈다. 이후 얼마동안이나 아전생활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부친이 사망한 1877년까지 계속됐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연보에 따르면 “그가 셈에 밝아서 관찰사나 수령들이 그를 존중했다”는 기록이 전해질 만큼 이때 그는 남다른 재주를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임병찬은 후진들에게 한학을 가르치며 학문의 길에 정진했는데, 한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사숙하려고 모여들어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태인으로 운둔

32세 때인 1882년 태인현 산내면 영동으로 이사를 한다. 선조의 선영이 있는 30년 이상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깊은 산골로 들어간 일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점점 허약해가는 국운과 타락해가는 세태를 한탄해서, 임오군란이 일어난 것을 보고 세상과 떨어져 숨어 살기 위해, 혹은 지역에서 이미 향리집안으로 소문이 나 있어서 양반으로 행세하기 어려운 가계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다. 임병찬은 재질이 남달라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기도 하고, 비록 급제하지는 못했으나 전주부에서 시행한 무과시험에 응시하기도 했지만, 좁은 지역사회에서 향리였다는 딱지를 쉽게 뗄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낙안군수로서 선정 펼쳐

1886년 임병찬은 전라도의 대동리로 전주감영에서 근무하게 됐다. 이때 정부에서는 거문도에 진을 설치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 감독관을 전라감사에게 천거토록 했다. 당시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는 모두 전라감사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전라감사 이헌직은 도내 유림의 추천을 받아 임병찬을 천거했고, 감독관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처음 관직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거문도에 진을 설치하려한 것은 1885년 영국 함대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다는 이유로 이곳을 무단 점령한 사건 때문이었다. 조선정부는 이때서야 비로소 방치됐던 섬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임병찬은 감독관으로 부임해 들뜬 인심을 수습하고 단시일 내에 무사히 공사를 마무리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포상으로 그에게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을 제수하고, 아울러 예에 따라 그의 선대 3대를 추증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그리고 1889년 7월 임병찬은 낙안군수 겸 순천진관 병마동첨절제사에 제수됐다. 그해 8월 곧바로 부임해 아전들의 폐를 없애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지 못하게 하고, 죄 없이는 한 대의 매도 때리는 일이 없도록 했다. 또한 1884년 이래로 체납된 세금 6만7천량과 쌀 1천800여석을 모두 추징해 오랫동안 쌓인 폐단을 일소하는 업적을 남겼다. 1890년 9월 그는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낙안 군민들은 그의 유임을 진정했으나, 정해진 임기가 다 채워졌다는 이유로 정부에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회문산 아래서 거사 준비

집에 돌아온 임병찬은 3년 뒤인 1893년 같은 태인현 산내면에 있는 회문산 아래 해발 400m가 넘는 높은 산속에 위치한 천혜의 피난터 종송리로 이사했다. 그는 이곳에 공자를 모신 사당과 흥학재라는 학당을 지어 놓고 모여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단순히 학문만을 익히게 한 것이 아니라 활쏘기와 말타기 등의 무예도 익히게 했다. 후일을 도모하기에 안성맞춤이었기에 임병찬이 이곳을 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본래 이 마을에는 7호가 살았을 뿐이었는데, 그가 이사 온 뒤에는 70호에 수백 명의 호구로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그중 대부분은 그를 따라 모여든 제자들이었다.

그러던 1894년 그의 나이 44세 때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그는 동학의 우두머리인 김개남을 붙잡아 관아에 넘긴다. 유학자로의 삶을 살던 그에게 있어 체제전복을 꿈꾸는 동학도들은 폭도로 비춰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평소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 간 밀계에 의한 것이란 말도 나온다. 동학도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어쨌든 이 일로 인해 조정에서는 임병찬에게 무남영 좌령관을 제수한다. 하지만 사양한다. 그러자 이번엔 임실군수가 제수된다. 이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는다. 임병찬이 두 차례나 벼슬을 사양하자, 고종은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을 종송리(種松里)에서 종성리(宗聖理)로 고치도록 해 그 뜻을 기렸다.

그 후 독립신문 1897년 5월 20일자에 의하면 임병찬은 종성리를 무대로 무기를 수집하고 포수를 모집하는 등 거병준비를 하다 발각된 것으로 나온다. 이로 인해 3개월간 끌려가 심문을 받았으나 혐의 없음으로 드러나 풀려났다. 이 후에도 임병찬은 여전히 종성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시국을 관망하며 살았다.

조선 유림을 대표하는 최익현이 멀리 떨어진 전라도 태인까지 내려와 임병찬과 손을 잡고 창의를 도모한 것도 다 임병찬의 이 같은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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