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선비 최익현의 구국의 일념
대한의 선비 최익현의 구국의 일념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6.11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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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의 태두인 면암 최익현만큼 한말 의병활동에서 추앙받는 인물도 흔치 않다. 그는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 깊은 학식과 곧은 절개로 위정척사의 정도를 지키려 몸부림쳤다. 그러다 말년에는 한 몸 희생을 결심하고 호남지역까지 내려와 항일 무장투쟁을 감행한다. 승산 없는 항일 무장투쟁임을 예견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저버리지 않는 최후의 항쟁을 펼쳤고, 결국 일제에 붙잡혀 적국의 땅에 갇히고 만다. 그곳에서도 원수의 밥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을 단행하는 등 끝까지 굴하지 않았고 저항하다 마침내 순절하는 대의를 세웠다. 선비의 곧은 절개와 그의 구국일념은 적국의 땅에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죽음에 이른 신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 경비대 안에서 서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황제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중략) 신이 이곳에 온 뒤로 한술의 밥이나 한모금의 물도 다 적에게서 나온지라 설령 적이 죽이지 아니한다 해도 신이 차마 먹는 것 때문에 자신을 더립힐 수는 없기에 식사를 거절하고, 옛사람의 ‘자신을 깨끗이하여 선왕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의리를 따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중략) 엎드려 바라오니, 폐하께서는 나랏일이 할 수 없이 됐다고 속단 마시고, 큰 뜻을 더욱 굳게 하고 과감하게 용진하며 원수 왜놈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새겨 주십시오. 실속 없이 형식을 믿지 마시고, 놈들의 무도한 위협을 겁내지 마시고, 간사한 무리들의 아첨을 듣지 마시고, 힘써 자주체제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길이 의뢰하는 마음을 끊어버리고, 와신상담의 뜻을 굳게 새겨 실력양성에 힘쓰고, 영재와 준걸을 불러들이며, 군인과 백성을 아껴 길러 사방 형편을 봐가면서 일을 하시옵소서. 그러면 이 나라 백성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것이요, 어찌 폐하를 위해 죽을힘을 다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지 않겠사옵니까. (중략) 신이 죽는 마당에 이르러 정신없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속단 마시고 더욱 보중하시기를 지하에서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후략).”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마지막으로 임금께 올린 글

△최익현의 죽음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한 의병이 전국에서 크게 일어났다. 전북지역은 1906년 6월 4일,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정부 찬정을 지낸 최익현과 전 낙안군수 임병찬 등이 최초로 대규모 봉기를 주도했다. 이들은 열흘 정도밖에 활동하지 못하고 관군에 의해 강제해산 당했다. 하지만 무성서원 봉기는 호남의병 활동의 도화선이 된다. 백낙구, 기우만, 고광순, 이항선, 강재천, 기우일, 박봉양, 양한구, 양회일, 이석용, 전해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인물들이 호남의병의 맥을 이어갔다. 또한 최익현은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한 조선유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기에 전국적인 파장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은 그해 8월 14일 최익현에게 군율위반죄를 적용, 대마도 감금 3년형을 내린다. 그는 대마도에서도 한국선비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압송된 지 4개월여 만인 1907년 1월 1일 새벽에 차가운 적지에서 순국하고 만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최익현의 시신이 부산에 도착하자 부산항의 조선인 상점은 대부분 철시했으며, 하얀 조기를 게양하고, 남녀노소와 계층을 불문하고 통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썼다. 그의 빈소가 차려진 부산의 상무사에서는 백수십 개의 만장이 하늘을 뒤덮었으며, 그를 추도하는 인파가 수만 명이나 몰려와 통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심지어 기생들까지도 언문으로 쓴 제문을 바치며 그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충성심을 기렸다. 청국의 직예총독 위안스카이와 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그를 추모하는 글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열강의 침략 의도 상소로 일깨워

최익현의 자는 자겸(資謙), 호는 면암(勉菴), 본관은 경주로,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비범하며 안광이 빛나고 총명해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6세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했으며, 14세 때 대학자 화서 이항로 선생을 찾아가 제자가 됐다. 저서로는 면암집 40권, 속집 4권, 부록 4권이 전해지고 있어 높은 충절과 함께 대유학자의 학덕을 대변하고 있다.

1860년대를 전후해 최익현은 위정척사운동을 주도하는 인물로 크게 부각됐다. 그는 제국주의 열강의 의도를 정확히 예견하는 상소를 거듭 올리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병인의소(1866)를 비롯해 지부복궐척화의소(1876), 청토역복의제소(1895), 선유대원명하후진회대죄소(1896), 청토오적소(1905), 창의토적소(1906) 등을 통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상소운동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제주도, 흑산도 등지로 귀양을 가야만 했고, 수차례의 사직상소를 올리기도 한다. 또한 반일의 거두로 지목돼 일본 군인에 의해 두 차례나 강제로 억류당하기도 하고, 연금상태로 감시를 받기도 했다.

그러던 1905년 망국적인 치욕의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이에 임금에게는 상소 등의 언로로 을사조약의 파기를 진언하고, 일본 정부와 외국 공관에는 16조에 달하는 일본의 죄를 적어 보내 그 부당성을 알렸다. 그럼에도 별 효험이 없음을 알자 노구를 이끌고 최후의 수단으로 의병을 일으키게 되니, 그의 삶은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관철된 것이었다.

하지만 최익현의 봉기가 승리를 장담하고 의병을 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국력이 욱일승천하고 있을 때였다. 무기도 없이 도포 입은 선비가 그들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최익현은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그의 항일 투쟁은 대한 선비의
곧은 절개와 충절이 무엇인가를 만천하에 보여줬다.

그는 800여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어 일본과 일전을 벌여보려 했지만 상대가 일본군이 아닌 우리 진위대라는 이유로 싸움을 포기하고 순순히 잡혀 마침내는 이국땅에서 순절한 것도 그가 목숨처럼 지켜온 대의명분이었다. 최익현은 대한인의 기개를 보여준 최고의 선비였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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