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창의는 호남의병항쟁의 서막
병오창의는 호남의병항쟁의 서막
  • 김상기기자
  • 승인 2012.05.28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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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남 항일투쟁의 선봉 임병찬 의병장

1876년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으로 조선의 문호가 개방된다. 이후 거침없이 밀려드는 외세에 적절히 대항하지 못한 정부는 결국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고 만다. 일제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동학과 의병, 국채보상운동, 계몽운동 등 민간이 주도한 다양한 형태의 국민운동이 일어난다.

항일 의병항쟁은 집권층의 부패와 무능,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와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때 민초들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구국투쟁이다. 제국주의 일제의 침략주의에 맞서 처절한 무장투쟁을 전개한 세계 약소 민족의 자주독립 운동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빛나는 독립투쟁사가 아닐 수 없다.

전북에서의 한말 의병항쟁은 임병찬 의병장이 최익현을 맹주로 추대해 일으킨 병오창의(1906)가 그 서막이었다. 유림을 대표하는 최익현이 의병활동의 선봉에 서면서 병오창의는 의병의 전국 확산에도 기폭제가 됐다. 의병활동의 중심지가 호남이 되도록 한 시발점이도 하다.

하지만 100여년이 지난 지금 전북의 의병활동은 그 처절했던 구국정신이 계승 발전되기는 커녕 역사적인 평가작업마저 진행되지 못한채 잊혀져 가고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와 미국은 각각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일으켰고, 일찍 개항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1875년 운양호 사건을 일으켜 개항을 강요했다. 당시 격전지였던 강화도 초지진에는 지금도 포탄흔적이 남아있어 당시의 처절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병오창의의 주역 최익현과 임병찬이 유배당한 대마도에는 그곳에서 순국한 최익현의 순국비가 자리잡고 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지금도 수많은 당시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처절했던 한말 의병활동이 재평가되고 선열들의 나라사랑과 구국정신이 계승발전되는 계기 마련이 이번 기획취재가 지향하는 궁국의 목표다.

 

 

<1>한말 호남 항일투쟁의 선봉 임병찬 의병장

 

▲ 임병찬 장군 초상.

민족의 강인한 저항정신을 표출한 의병항쟁은 집권층의 부패와 무능,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일어난 애국운동의 대표적 형태였다. 항일 의병항쟁은 일제에 의한 보호국체제하에서는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주도했고, 식민지 체제하에서는 항일무장독립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제국주의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 처절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세계약소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한말 항일 의병항쟁의 핵심적인 인물은 바로 임병찬 장군이다. 임병찬 장군이 주도한 병오창의(1906)는 전북지역에서 최초로 일어난 집단적 항일무장 투쟁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유림을 대표하는 최익현과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의병활동의 전국 확산에도 크게 기여했다. 1908년 이후 전국 의병운동의 중심으로 호남이 우뚝설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유림인 최익현의 거병 아 가능했던 것도 임병찬이라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북의 항일의병, 더 포괄적으로는 한말의 항일의병을 대표하는 인물이 임병찬 장군인 셈이다.

△김개남과의 악연, 그리고…

그렇지만 10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의병장 임병찬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오히려 방치된 느낌마저 든다. 전북지역 의병운동의 도화선인 임병찬의 업적이 과소평가되면서 한말의병운동 전체에 대한 평가도 소홀히 다뤄지고 묻혀가는 모양새다.

동학과 의병,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구)한말의 역사적 사건을 한 줄로 엮어내야만 우리의 근현대사가 비로소 제 위치를 찾을 수 있다. 그래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한말 의병사는 임병찬이라는 인물이 그 중심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임병찬에 대한 저평가는 의병항쟁에 대한 연구가 아직까지도 미진하다는 데서 그 첫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임병찬이란 인물만으로 본다면 김개남과의 악연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3대 우두머리 중 한 명인 김개남이 평소 알고 지내던 임병찬의 밀고로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일로 인해 동학도들은 임병찬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됐다. 지금 동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동학과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당시의 밀고사건으로 인해 임병찬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임병찬의 주 활동무대가 바로 전북 정읍이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근원지도 정읍이다. 정읍은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과 같은 반봉건투쟁에 앞장선 걸출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바로 이 지역에서 보수적인 양반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 일어났음은 의외의 일로 여겨질 수 있다. 동학과 의병은 동일하게 제국주의 세력의 척결을 주장했지만 반봉건 대 성리학적 체계 고수, 농민 대 유림 등 지향점과 세력이 판이하게 달랐다. 이들 서로 다른 성격의 두 가지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 정읍이라는 단일 지역을 기반으로 진행된 것이다. 현재 정읍은 지역코드로 동학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러다보니 김개남과 임병찬의 관계성으로 인해 동학이 대세인 정읍에서는 의병을 소리 높여 말할 수 있는 이가 거의 없게 됐다. 그 둘 간의 관계가 원만했다면 임병찬에 대한 지금과 같은 저평가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새롭게 재정립해야 할 의병과 동학.

▲ 임병찬 장군이 최익현을 맹주로 추대해 병오창의를 일으킨 무성서원.
최근들어 임병찬의 당시 행동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어, 임병찬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그간 일방적으로 적대시되던 것과는 상반되는 것이어서 주목되는 부분이다. 임병찬은 김개남을 밀고한 공으로 조정으로부터 무남영 좌령관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다시 임실군소를 제수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포상에 눈이 멀어 밀고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그리고 1906년 최익현과 함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붙잡혀 대마도로 유배까지 당한다. 이후 재차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던 중 1912년 고종으로부터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으로 임명한다는 밀지를 받고 전국적인 독립의군부를 결성,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다 일제에 붙잡혀 거문도로 다시 유배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임병찬의 삶을 되짚어보면 철저히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살았다. 일제에 협조하기 위해 김개남을 밀고한 것이 아니란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그러면 왜 그는 김개남을 밀고했을까. 여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 최근 고육지계와 유림의 한계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어 이에 대한 세밀한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고육지계는 임병찬의 밀고가 평소 알고 지내던 두 사람의 암묵적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김개남을 해할 목적이 아니라 더 많은 동학농민군들을 살리기 위해 임병찬과 상의 후 김개남 스스로 동학의 대표로 잡힌 것이라는 말이다.

유림의 한계는 당시 유림들은 왕이 아무리 잘못했어도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는 것은 모두 난(亂)으로 인식했다는 주장이다. 성리학적 체계를 유지하려 했던 유림의 시각에서 본다면 국왕과 국모와 같은 나라의 주인에 대항해 일어 선 동학농민군들은 역적이었고, 그들을 타도하려한 것은 그들 나름의 충을 위한 신념의 발로라는 것이다.

물론 이 요인 외에도 의병이 저평가되는 이유는 다수 있을 수 있다. 병오창의 맹주로 추대된 최익현이 누구인지, 임병찬이 누구인지,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그들은 어떤 세상을 추구했는지 등을 하나씩 집어가다 보면 의병의 역할을 재평가할 수 있는 조그만 단서쯤은 제공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가져본다.

이번 기획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의병’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노력의 일환이다. 또한 전북지역의 정체성을 재조명하고 회복함은 물론 후손들이 계승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찾아내고 다지는 의미도 있다고 본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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