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의 독아지가 없어지다
장독대의 독아지가 없어지다
  • 황의영
  • 승인 2012.04.1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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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시골집에 왔는데 장독대에 큰 독아지가 없어요. 형님이 처분하셨어요?”라고 말하는 동생 목소리가 떨린다. “고종사촌 형수가 장 담근다고 독아지 하나만 달라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몇 개나 가져갔어?” “장독대에서 두 개, 광에서 한 개, 그리고 항아리 뚜껑이 모두 없어졌어요.” “형수가 한 개만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상하네, 내가 알아보고 전화해 줄게”하고 전화를 끊었다. 불길한 예감에 머리끝이 곤두선다. 가슴이 콩탕거리며 뛴다. 마침 주말이어서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뵙기 위해 전주에 가는 차내에서 전화를 받았다. 독아지가 없어졌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길 간절히 기원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길 바랬다. 독아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늦게 확인하려고 고종사촌 형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아버지 병문안을 한 뒤 직접 고모님 댁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동네는 1960년대 베이비부머(baby boomer)들이 태어나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오십여 호가 넘었는데 지금은 스물한 가구만 남아 있다. 그나마 대부분이 노인 혼자 사시는 집들이 많다. 들도 넓지 않아 논보다 밭이 많은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다. 우리 집은 앞마을에 살다가 아버지가 막 결혼해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1940년대 초반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공직에 몸담으실 때 잠시를 제외하고는 줄곧 이곳에서 살고 계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혼자 고향 집에서 계셨는데 기억력이 떨어지고 거동이 불편해서 작년 여름 요양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계신다. 이번에 뵈니, 아버지는 입원하실 때보다 병세가 더 깊어지셨고 숯불이 사위어가듯 아버지의 생명도 서서히 사위어가고 있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버지의 건강을 빌며 병원을 나와 고향 집 이웃마을에 있는 고모님 댁에 갔다. 형수에게 살며시 물어봤다. “지난번 말씀하시던 장독은 가져오셨어요?” 하고 물으니 “허리도 아프고 해서 그냥 집에 있는 독아지에 장을 담았어요.” 한다. 가져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둑맞은 것이다. 없어진 독아지는 어른 목까지 닿는 커다란 항아리다. 조부님께서 살아 계시고 우리 형제들이 어릴 때 온 식구가 몇 년간 먹을 된장이 가득 담겨져 있던 장독들이다. 때로는 마른 나물과 건어물을 담아두던 식품저장고 역할도 했다. 광안에 있던 독아지는 볍씨를 담거나 콩을 담기도 했던 뒤주역할을 했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독아지들이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우리 집의 소중한 생활용품이었다는 것이다. 몇백 년은 족히 되었을 조상님들의 손때가 묻고 우리 가문을 이어오게 한 가보(家寶)였다. 할머니 어머니로 이어오면서 독아지도 전해졌고, 장맛도 함께 이어 내려왔다. 여름 철 상추에 보리밥을 얹고 그 위에 날된장을 얹어 쌈을 싸서 볼이 터져라 입에 넣고 먹으면 꿀맛이었다. 보리밥에 열무를 손으로 뚝뚝 잘라 넣고 된장국을 넉넉하게 넣고 비벼먹으면 게 눈 감추듯 밥 한 그릇을 해치웠다. 장독은 우리 조상 대대로 생명을 이어준 소중한 것이었다. 이렇게 소중한 보물들을 내가 관리를 잘 못하여 잃어 버렸으니 죽어 어떻게 선조님들을 뵈올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서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며칠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장독은 우리 가정 어느 집이나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가재였다. 지금은 가공식품제조기술이 발전하여 다량 생산한 장류(醬類)를 사먹고 있지만 옛날에는 가정마다 장을 담가 먹었다. 그 집안의 장맛이 좋아야 음식 맛이 좋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장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장맛이 좋을려면 독이 좋아야 한다고 한다. 독이 숨을 쉬기 때문이라 한다. 좋은 독 속에 들어 있는 된장은 맑은 공기를 빨아들이며 몇 년의 세월을 걸쳐서 발효되어 맛있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가문마다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는 음식의 가장 기본적 요소인 장을 담는 항아리를 남의 집 장독대에서 들어가고 있으니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해도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남의 집 장독대에서 장독을 들고 가는 사람의 마음은 무슨 색일까? 붉은색일까? 노란색일까? 검은색일까? 아마도 시꺼먼 검은색일 것이다. 양심에 털도 났을 것이다. 농촌마다 노인만 계시는 집이 많고 노인들이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을 노리고 농촌에 좀도둑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경찰의 구조조정으로 농촌의 많은 지·파출소들이 없어졌다. 그런데 농촌에는 수확한 농산물, 농가의 귀중품, 이제는 장독대의 독까지 훔쳐가고 있으니 경찰에서는 도둑을 예방하는 대책을 하루빨리 마련하기 바란다. 도둑을 잡는 것보다는 도둑질을 못 하도록 하는 것이 더 상책이다. 순찰을 강화하고 마을마다 주요 나들목에 CCTV를 설치하여 마을을 드나드는 사람과 차량을 감시하고 녹화하여 기록을 남겨놓아 사후에라도 도둑을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도둑질하면 잡힌다는 인식이 넓게 퍼져나갈 때 도둑들도 줄어들 것이다. 농가에서도 집단속을 철저히 잘해야겠다. 마을에서도 자체적인 방범활동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남의 집 장독대에서 장독을 훔쳐가는 도둑이 없어질 것이다.

황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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