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문 앞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
교문 앞에서의 민주주의와 인권
  • 김정훈
  • 승인 2012.03.29 18: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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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학교자치인가! -

“민주주의와 인권은 학교 교문 앞에서 멈춘다.” 이 말이 언제까지 피부에 와 닿아야 한단 말인가! 최근 도내 몇몇 학교에서 드러난 지문인식기와 CCTV 설치 문제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하긴 박정희 시대의 유물인 주민등록법에 의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생체정보인 지문을 날인하고 성인 통과의례를 하는 나라이다. 재일동포 강제 지문날인에는 그토록 흥분하면서 말이다. 학교폭력을 빌미로, 초과근무수당 부당수령을 빌미로 학교 출입문을 지문으로 통과하고 교실 복도에서 영상 감시를 당해야 하는 일이 ‘그냥’ 일어난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어리석음이다. 대체로 이런 학교들은 학생과 교사들의 동의조차 받지 않는다. 지문과 영상 정보는 소중한 개인정보이다. 더군다나 그 정보가 쌓이고 누군가에게 유출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인권의 시각으로 보면 교과부 등의 학교폭력 대책들도 문제이다. 학교폭력 해결책이라며 학생선도부(예전의 규율부)를 활용하려는 발상, 학생동원 학교폭력추방결의대회 그리고 경찰청과의 MOU체결 등은 학교에 대한 ‘감시와 처벌’이라는 구시대적 시스템 폭력을 재현하려는 시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이면에는 민주주의가 있다. 인권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교과서에서는 민주주의를 가르치지만 정작 학교 안에서는 실천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입으로 민주주의’가 폭력적인 사회문화를 만들고 99%의 소외를 낳는 양극화를 합리화시켰다. 학교도 그렇다. 학교 안의 민주주의는 실체 없이 떠도는 유령이 되어 절차에 필요한 장식으로 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의 아이들도 제도교육을 받으면서부터 서로를 존중하면서 토론하고 결정의 책임을 지는 일을 경험해야 한다. 이를 도와주는 것이 교육이다. 그런데 키는 산만한 고등학생들조차 학생회운영에 관심이 없고, 운영도 형식적으로 한다. 교사들이 떠먹여 주는 일만 겨우 할 뿐인 것이 대체적인 현실이다. 그러니 초 중학교의 학생자치는 더더욱 공염불일 밖에.

실은 교사와 학부모들조차 실천적인 민주주의 경험이 적다. 그래서 학교에서 해야 할 일들의 대부분을 누군가의 결정대로 따라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의견이나 절차는 거추장스럽다.

물론 사정이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입시몰입경쟁교육과 우리 사회의 결과주의가 교육을 왜곡한 것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마냥 방치해서는 도대체 미래를 꿈꿀 수 없다. 프랑스 등 유럽의 아이들은 우리의 초등학교 때부터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해 실천적인 교육을 받는다. 중학교 단계부터는 노사 단체협상 역할도 해보고 갈등 조절 훈련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수자, 노동인권, 시민사회의 가치 등을 마음과 몸속에 담게 된다. 우리의 아이들은 유럽의 아이들보다 미성숙한 존재인가?

아니다. 아니기 때문에 학교자치조례 제정을 제안한다. 교사자치, 학부모자치, 학생자치를 모아 학교자치를 해보자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교사회, 학생회, 학부모회 등을 보장하여 상호 관계를 규정하고 그에 따라 학교자치기구들이 결정해야할 사항들을 명시하자는 것이다. 학교장은 수평적인 리더십으로 집행권한을 가지면 된다.

학교자치가 학교폭력의 전부를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학교 안 민주주의의 싹을 틔워내고 인권의 보루 역할을 한다면 교권과 체벌의 해묵은 논란마저 사라질 것이다. 학교자치를 통해 학교의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책임을 성숙하게 행사하는 순간이 학교혁신의,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의 첫 발이 될 것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섬뜩한 지문과 CCTV와 같은 반인권적인 감시와 처벌의 도구가 없어도 협력과 화해라는 교육의 장이 펼쳐질 것이다. 학교의 교문은 민주주의와 인권으로 활짝 열려야 한다.

김정훈<전교조 전북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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