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대로 내어 주는 길
걷는대로 내어 주는 길
  • 김완순
  • 승인 2012.02.14 18: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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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 즐겨한다. 건강을 위해서 시작한 것이 이제는 생각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되어서 더욱 소중하다. 이런 속내를 모르는 지인들이 배려하는 마음에 헤어질 때 “가는 길에 모셔다 드릴게요. 타세요!” 하는 미소 어린 권유를 뿌리치기 힘든 경우가 아니면 항상 걷는다. 걷기를 통해 필자는 특정 장소와 친밀하게 접촉할 수 있다. 교동아트센터에서 출발해 젊은이들의 활기찬 발걸음이 있는 시내를 지나 중앙시장을 가로지르면 나의 쉼터인 S아파트에 도착한다. 이 코스는 전주의 사람 사는 풍광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에 더욱 매력적이다.

우리 조상들이 직립보행을 시작한 지 약 600만 년이 지났다. 역사를 통틀어 반드시 걸어야 하는 사람들은 지위가 낮고 권력이 별로 없는 계층이었다. 그들은 탈것을 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걸었을 것이고, 걷는 사람보다 가만히 앉아서 탈것(처음에는 말과 마차, 그 다음에는 기차와 자전거, 마지막으로 자동차, 트럭, 버스, 비행기)을 타고다니는 사람들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앉아있는 시간, 차를 타는 시간, 차를 운전하는 시간은 계속 늘어나고, 걷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제는 반드시 걸어야 하기보다는 선택적 걷기를 하고 있는 시대이다. 걷기는 시간을 응고시키고, 거리를 팽창시키고, 어떤 장소에 복잡한 세부사항들을 빼곡하게 채워 넣는다.

현대자본주의는 차이를 만들어 내어 차별화하는 것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데 있다. 자본주의의 적은 대립적인 사회체계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든 욕망’ 그 자체일 것이다. 한국사회는 생존과 생활의 시대를 넘어, 행복 추구와 의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는 기본적인 욕망이 채워졌으니 의미 있는 새로운 ‘자기문화(自己文化)’를 만들 필요가 있다.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가 말에 따르면, ‘기본적인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건강한 몸과 평온한 정신상태를 가지고 명랑한 정서 생활을 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의 행복론이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와 닿는다.

전주는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도시이다. 최근에는 ‘가장 한국적인 도시’라는 명예를 얻었고, 도시의 건강한 발전과 장기적인 자생력을 위해 전통문화중심도시의 추진, 문화재단의 운영, 한(韓) 브랜드의 거점화, 축제와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의 지원, 한옥마을의 집중 육성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인프라에 힘입어 한옥마을에서는 가볍고 멋스러운 차림에 볼거리를 찾아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주변의 풍경을 즐기는 관광객이 많다. 반면에 전주시민은 앞만 보고 걷는 것이 아쉽다. 한번쯤은 우리도 익숙한 시각에서 벗어나 낯선 시선으로 걸어보면 어떨까?

내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내 조상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면서, 또 나 혼자 걷고 있는 그런 길이다. 걸으면서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고, 장차 그 길을 걸을 사람들을 위해 그 길을 다져간다. 세상의 모든 길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의 것이다. 따스한 창호지 불빛, 정감 넘치는 토담길과 추억과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윽한 묵향이 담을 넘는 한옥마을의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다. 기(氣)와 능선이 이어지는 한옥마을은 온몸으로 걸어야 한다. 골목에서 마주친 것들을 눈으로만 보면 정(情)이 없고, 귀로만 들으면 흥(興)이 없고, 손으로만 만져보면 뜻을 모를 것이다. 서로 가슴에 품고 천년을 사는 골목들처럼 그 숨결을 보듬어야 제 맛이 난다.

한옥마을의 골목은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을 내어 준다. 끈길 듯 끈길 듯 이어지는 천년의 길. 석양 아래 짙은 처마 그림자가 골목길에 드리울 때면 한옥마을은 더 없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허정(虛靜)한 마음과 느린 걸음으로 한옥마을을 걸어보자! 장자는 가장 빨리 가려면, 빨리 가려 하지 말고 꾸준히 가라고 했다. 높이 보려 까치발을 들면 힘이 들어 오래 볼 수 없고, 보폭을 넓혀 빨리 걸으면 쉽게 지쳐 멀리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없이 고즈넉한 마을 길을 걸으면서 의미의 시대에 행복하게 사는 방법과 ‘자기문화’를 찾아보자! 그 문화의 형태와 질이 그 사람이다.

김완순<전주교동아트센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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