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여는 새해
시로 여는 새해
  • 이동희
  • 승인 2012.01.10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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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만 싣는 전문지 중에 『시로 여는 세상』이라는 잡지가 있다. 계간이라 일 년에 네 번 나오는 잡지로 시문학을 전문으로 다룬다. 이 잡지의 내용은 차치하고 그 제호가 마음을 끌어 관심이 가는 잡지다. ‘시로 여는 세상’이라고 잡지의 이름을 붙인 발행인의 의지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듯하여 하는 말이다.

이 제호에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에 대한 의미가 확립되어야 제 뜻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시 잡지의 됨됨이야 어찌 되었던 그 의지가 그리고 있을 그림을 상상해 보는 것도 시문학과 세상의 관계 파악, 또는 시와 세상의 됨됨이를 알아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시’가 무엇이기에, 그 시로 ‘세상’을 ‘열고’ 싶을까? 1월 1일은 한 해를 여는 첫날이다. 생활력 설날이 바로 엊그제였고, 우리의 전통 설날이 또한 며칠 후에 다가오고 있다. 이런 때에 하루를, 한 해를 시로 여는 세상을 그리워하기에는 필자도 누구 못지않게 간절하다.

시에 관한 의미 규정은 차고 넘친다. 시 작품 하나하나가 바로 시인이 말하는 시의 정의요 의미라고 보아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시의 됨됨이가 그렇다. 어느 한 가지로 규정되고 획일적으로 자리매김 되기를 원치 않는 속성을 시 스스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에 관한 사전적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는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리듬 있는 언어로 갈무리하여 인간의 정신력을 심미적으로 고양하는 언어예술이다. 여기에는 시가 갖춰야 할 기본 요소들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어 시의 개념에 대한 표준이 될 만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시를 낯설게 여기는 이들의 궁금증과 탐구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는 한참 미약하다. 이런 건조한 교과서적 정의보다는 차라리 한 편의 시를 안겨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매리 올리버라는 시인은 시로 쓴 시「시 입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시는 삶을 소중하게 하는 힘이다./ 시를 위해 말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 불이 필요하듯이,/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밧줄이 필요하듯이,/ 배고픈 사람에게 주머니 속 빵이 소중하듯이/ 시는 그러하다./ 정말 그렇다!>
시가 생명의 양식이란다. 추위에 떠는 사람에겐 따뜻한 불이요, 곤경에 처한 사람에겐 구원의 밧줄이며, 굶주린 사람에겐 허기를 달래는 밥이라고 했다. 정말 그렇다고 했다. 사람이 입으로 들어가는 밥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올리버의 시는 세상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으리라.

그런 열쇠로 여는 세상은 어떤가? 세상은 나(시인)에게는 밖이요. 세계다. 세상을 이루는 핵심 요소가 사람이다. 타인마저 나(자아)에겐 밖이요. 세계다. 우리가 세상이라고 할 때의 그것은 ‘사람이 이루는 사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없다. 사람이 이루는 세상(사회)을 시인(나)은 이렇게 본다.

<나는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개, 저것은 집, 여기 시작이 있고 저기 끝이 있다.”라고/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들의 감각과 농간이다./ 그들은 미래도 과거도 다 알고 있다./ 그들에겐 산도 이미 신기하지 않고/ 그들의 화원과 집은 신에 닿아 있다// 나는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으라’라고 권하련다./ 나는 좋아한다. 사물이 노래하는 것을/ 너희들이 사물을 만지면 곧 굳어버린다./ 너희들은 저마다 그것을 죽이고 있다.> -릴케의「제목 없는 시」 중에서 일부를 옮겼다.

이것이 사람이 이루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의심해야 할 것은 의심하지 않는 맹신, 믿어야 할 것은 믿지 않는 불신, 버려야 할 것은 버리지 않는 욕망, 지녀야 할 것은 지니지 않는 허욕으로 가득 차 있다고 걱정한다. 주관의 맹목성을 의심하고, 객관의 교리를 절대 신격으로 떠받드는 세상(인간사회)을 릴케는 염려한다. 세상은 청맹과니들로 가득 차 있거나, 고정관념의 색안경을 쓰고 있거나,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절대 신앙을 신봉하고 있거나, 배타적 독선으로 가득 차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므로 세상을 시로 ‘연다.’라는 것은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연다는 것이다. 사연(事緣)이 아닌 자연(自然)의 교리에 눈길을 주고, 색안경을 벗고 무채색을 읽으며, 타인의 눈으로 나를 세우고, 나의 눈으로 타인을 받아들이는 행위다. 나의 눈으로 세상을 노래하되, 세상이 부르는 노래를 온몸으로 읽는 행위다.

시로 세상을 여는 날 ‘해빙한 자리마다 돋아나는/ 거룩한 새순의 합창,/ 잠시 오래 묵힌 새봄은 그렇게, 저기/ 꽃의 시샘처럼 오고야 말 것이다.’(졸시, 전북도민일보 신춘축시「저기, 잠시 묵은 새봄이 온다」에서)

이동희<시인·전북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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