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만 무성한 의병 현충시설
잡초만 무성한 의병 현충시설
  • 김상기 기자
  • 승인 2011.12.1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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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한반도 강점을 본격화한 한말 이후 나라를 지켜내고 자유를 찾기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온몸을 던져 항일투쟁을 벌인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북출신은 총 699명. 의병을 포함해 3.1운동, 광복군, 국내항일운동, 중국·만주·일본지역 항일운동, 문화운동, 애국계몽운동, 의열투쟁, 임시정부, 학생운동 등을 벌인 우국지사들이다. 이중 의병이 230명으로 가장 많고 3.1운동 관련자 223명, 국내항일운동 154명, 학생운동 22명, 광복군 12명, 나머지는 모두 10명 이내다.

그만큼 의병 활동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민족 투쟁의 역사다.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내기 위해 일신의 영달을 내던지거나 멸문지화를 무릅쓰고 의병활동에 나섰다 목숨을 잃었는가하면 온집안이 풍비박산난 의병들의 피맺힌 항일투쟁사는 백여년이 지난 지금 어떠한가. 제대로 된 발굴이나 조명작업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조상들의 빛나는 민족정신을 후손들이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조차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한말의병의 중심지인 전북지역에 남아 있는 의병 현충시설은 22곳에 불과하다. 이들 또한 소충사와 같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비석과 같은 단순 조형물일 뿐이다.

오합지졸의 의병을 규합, 연이은 3번의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 129명을 사살하는 대단한 전과를 올린 이규홍 의병장. 그가 나서 자란 생가는 십수년전 해체되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도 이곳이 의병장의 생가였음을 알고 있고, 지금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복원도 가능해보이지만, 그 흔한 설명문 하나 없고, 누구 한명 나서는 사람도 없다.

순창 회문산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쳤던 양춘영 의병장. 그의 묘는 현재 이정표도 없어 지인을 대동하지 않고서는 찾는 일이 쉽지 않다. 애써 찾아가도 자그마한 설명문 하나 없다. 양춘영 의병장의 활동무대 였던 회문산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본부가 있던 곳과 겹친다. 주민들 중에는 당시의 피해의식이 있어 지금도 입을 열지 않는 분들이 많다. 누군가는 나서서 양춘영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순창이 역사의 한 주역이었음을 말할 수 있다.

호남 의병의 정신적 지주였던 전기홍 의병장을 기념하는 ‘의사전해산추모비’는 번암중학교 정문 앞 비각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관리의 어려움을 들어 출입문은 굳게 잠겨 있어 비석에 기록된 내용조차 확인할 수 없다.

고창 문수사를 거점으로 활동하며 백성들로부터 ‘진짜 의병은 박포대 의진뿐’이라는 칭송까지 들었던 박도경 의병장은 더 심한 상황이다. 아마도 고창군민 기억 속에서 머지않아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기삼연과 함께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문수사에는 의병과 관련된 문구 하나 찾아볼 길이 없고, 고창읍 교촌리에 있던 묘소와 ‘한말의사박도경추모비’는 지난 2009년 후손에 의해 대전 현충원으로 옮겨졌다. 고창의 역사를 대변해줄 수 있는 기념물 하나가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사이 조용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현재 그의 고향이라는 고창에서 그를 떠올릴만한 기념물은 전무하다.

현충시설뿐만이 아니다. 한말 전북지역 항일의병사에서 획을 그을 만한 역사적 장소들 역시 푸대접 받기는 마찬가지다.

1903년 호남유림대회가 열리고, 유림들이 모여 서보단을 쌓았다는 정읍시 내장산 벽련암 뒤편의 석란정. 그곳에는 호남을 대표하는 27개 향교 54명의 유림들이 모여 일제에 대한 복수를 결의했다. 비록 무장투쟁으로 이어지진 못했지만, 반일본 기치를 내건 유림들 최초의 집단적 움직임이라는 데에 큰 의의가 있는 사건이었다. 이때의 모임은 1906년 병오창의의 정신적 자양분이 됐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바위에 새겨진 ‘석란정’이라는 글씨만이 역사적 현장임을 말해줄 뿐이다. 독립운동사에서 전북이 자존심을 갖기 위해서는 이곳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또한 한말 전북 의병사에서 정읍 산내면 종성마을이 상징하는 바는 매우 크다. 1906년 정읍 무성서원에서는 임병찬이 유림의 태두였던 최익현과 함께 전북지역 한말 최초의 집단적 항일 무장투쟁에 돌입한다. 현재 종성마을에는 ‘임병찬 창의 유적지’가 있는데, 임병찬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의병을 훈련시키던 곳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종성마을이라는 거점이 없었다면 병오창의도 불가능했을는지 모른다. 한 때 150호를 헤아렸다는 이곳에는 현재 단 6가구 10명의 주민이 살고 있을 뿐이다. 그 중 김영환(74)씨는 10대째 여기 살고 있는 이 마을 유일의 산증인이다. 임병찬 장군 유적지는 그가 홀로 관리하고 있다. 누구 시켜서가 아니라 마을의 자랑이라며 스스로 나선 것이다. 그가 아니라면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곳이 푸대접 받는 것은 아마도 동학과 얽힌 실타래 때문일지 모른다. 동학농민혁명의 3대 우두머리 중 한 명인 김개남이 임병찬의 밀고로 붙잡혔던 것. 당연히 동학에서는 임병찬을 멀리하게 됐고, 동학이 대세인 정읍에서 임병찬의 의병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전북지역 한말 의병이 부각되기 위해서는 임병찬에 대한 평가가 무척 중요한데, 그게 원천봉쇄된 형국이다. 최근에는 임병찬의 밀고가 나머지 동학도들을 구하기 위한 고육지계란 주장까지 나오면서 임병찬과 동학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의병운동의 재조명 사업이 정치논리에 의해 진행되는 안타까운 장면도 곳곳에서 발견됐다. 회문산 중봉아래 돼지툼벙이라 부르는 계곡이 있던 안내앙굴은 양춘영 의병장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에 의병공원을 만든다며 2005년부터 도로개설 작업이 시작됐지만, 단체장이 바뀌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 그곳은 도로포장이 중간에서 끊겨 잡초만 무성하다.

현재까지 한말 의병장에 대한 성역화사업이 어느 정도 완료된 곳은 이석용 의병장과 28의사를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소충사가 유일하다. 무성서원이나 대한이산묘 등은 제법 규모 있는 의병관련 현충시설이기는 하나, 다른 여러 의미가 혼재돼 있어 순수한 의병시설물은 아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단순 조형물에 불과하다. 현충시설 관련 활성화 사업도 단편적인 초중고등학생 탐방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반가운 일은 전기홍 의병장 성역화사업이 이르면 내년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익산의 이규홍 의병장 기념사업회도 올해 출범에 성공, 성역화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주변을 조금만 되볼아봐도 불과 100여년 전 피흘려 이 땅을 지킨 의병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더 늦기 전에 그분들의 업적을 재평가하고 복원 보존하는 한편 관광자원화하는 등 후손에게 전해줄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김명한 지청장
김명한 전주보훈지청장 인터뷰

“현충시설은 짓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후손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가를 더 많이 고민해야 합니다. 후손들이 현충시설을 자주 찾을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이 시급합니다.”

전주 출신의 김명한 전주보훈지청장은 한말 의병에 대한 재조명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본사가 기획취재 과정에서 지적한 양춘영 의병장 묘소 이정표 작업을 순창군에 협조요청하기도 했으며, 완주군 비봉면 구의사유적지에 대한 관리도 지자체를 직접 방문해 상의하는 등 열의를 보이고 있다.

또한, 지역의 의병사를 논함에 있어 지난 1992년 전북향토문화연구회가 발간한 ‘전북의병사(상·하)’ 외에는 마땅한 기준 서적이 없고, 이후 새롭게 밝혀진 내용들까지를 포괄하는 새로운 의병사 정리작업의 필요성에도 공감의사를 보였다.

김 지청장은 “방대한 자료가 축적돼 있고 객관적 연구가 가능한 독립기념관에 전북의병사 조명사업을 의뢰해 보겠다”고 밝혔다.

 김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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