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고흥유씨 일문 구의사
(9) 고흥유씨 일문 구의사
  • 김상기 기자
  • 승인 2011.12.0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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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방곡마을은 고흥유씨의 집성촌이다. 한 가문에서 같은 시기에 무려 9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집안 내력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고흥유씨(高興柳氏) 일문구의사(一門九義士)라고 부른다. 그만한 숫자가 독립운동에 나섰을 때는 그 집안의 멸문지화를 각오해야만 한다. 그 중 3가문은 실제로 손이 끊기는 아픔을 겪었다. 민족의 자존을 지켜내야 한다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애국애족 정신이 면면히 전해져오지 않았다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 유흥석 생가터

고려말 문하시중을 지낸 유탁을 선계로 하는 고흥유씨(高興柳氏). 임진왜란 후 양성현감을 지낸 유지호가 이거해 오며 집성촌이 형성됐다.

이 집안의 내력을 보면, 20대조인 유습 장군은 세종대왕 연간에 이종무 장군을 보좌해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이때 대마도주는 항복했고, 조선에 대해 신하의 예를 다할 것을 맹세한 바 있다. 또한 조선조 임진왜란에 호성공신인 유광의 후예이기도 하다. 집안에서만 전해지는 내력으로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총도 집안사람인 유인석 의병장이 내줬다고 한다. 고흥유씨중앙종친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유희빈(64)씨는 “당시 안중근 의사가 거사에 사용하려던 총이 마땅치 않자 유인석 어르신이 쓰던 총을 내줬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의병사 연구자들은 대부분 전북지역의 한말 의병활동을 1906년 정읍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최익현과 임병찬과 주도로 거의한 병오창의에 두고 있다. 하지만, 고흥유씨종친회는 집안이 의병활동에 뛰어든 시점을 1895년에 둔다. 그해에 단행된 단발령과 국모시해사건으로 촉발된 구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운동을 을미의병이라 부르는데, 기록으로만 본다면 이때의 전북지역 의병활동은 극히 미비했다.

고흥유씨종친회의 주장은 을미의병 당시 충주와 제천 일원에서 활동한 유인석 의병대장이 같은 집안사람이었다는 데서 출발한다. 유희빈씨는 “유인석 장군의 할아버지 산소가 여기 비봉에 있어. 그런게 거리가 멀긴해도, 일년에 한두번씩은 꼬박 여기를 다녀갔을 거란 말이여. 교류를 했다는 것이지. 그리고 유인석 전투기록에 보면, 유치복이라는 이름이 나와. 그분이 누구냐하면 여기 구의사의 중심적 역할을 한 분이여. 공개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여기 비봉에 사는 우리 집안은 이미 그때부터 의병활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이지.”라고 말한다.

구의사는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에서 출생한 유중화(자는 치복)를 중심으로 한 유연청, 유영석, 유연풍, 유태석, 유연봉, 유명석, 유준석, 유현석 등 구인이다.

병오창의로 도내에서도 의병활동이 본격화되자, 고흥유씨 사람들도 분주해졌다. 이때 유중화는 각처에서 봉기하는 의병들과 같이 구국의 일선에서 신명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동지 유지명과 송태식(조카사위) 등과 모의한 뒤, 앞에서 언급한 친족 8인과 생질 이유종, 이태종 등 수명을 대동해 1907년 가을부터 의병을 조직해 군자금을 모으고, 무장항쟁을 벌이는 등 본격적인 의병활동에 나선다. 이에 호응한 호민이 280여 명 규모였다고 전해지며, 호남과 충남지방까지 세력을 뻗쳤다.

한때는 익산의 이규홍 의병단과 합세를 하기도 하고 혹은 각지의 의병단과 연합전선을 펴기도 했지만, 주체는 유중화 등 구의사를 중심으로 하는 일대의 의군단이었다. 이들은 비봉면 소농리 불당동에 병기제작소를 두고 창검 및 탄환, 화승총을 사냥총으로 총포를 개조 보급하며 체계를 갖췄다. 이런 노력으로 고산, 익산, 여산, 용담, 진안과 멀리 진산, 금산, 연산에 이르기까지 활동을 넓혀 상당한 적의 군마를 격살하는 전적을 올렸다.

▲ 무기제작터

1907년 2월 금마산성에 매복했다가 헌병대를 습격 전멸시켰다. 1907년 11월 15일 현재의 화산면 화월리에서 격전해 왜병 29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4월 10일 연산자촌에서 왜병 2명을 사살, 1908년 9월 3일 고산에서 왜병 십여명을 사살, 1908년 10월 은진 왕성골에서도 왜병과 크게 접전해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자체 내의 비행을 숙청하고 친일파 일진회를 물리치기도 했으며, 군자금 모집에도 적극적이었다. 유중화는 1908년 12월 24일 윤병오라는 자가 의병을 사칭하면서 닥치는 대로 강간하는 등 풍기를 문란케 하므로 그자를 총살한 바 있다. 구의사는 1906년 10월과 1907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이봉승의 집을 방문해 군자금을 받고, 그해 10월에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노상에서 모금하고, 또 그 달에 한홍수에게서 군자금조로 돈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군자금 모금 기록은 일본 경찰에 의해 탐지된 것만 모은 것으로, 그들의 활동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말 의병사 연구자들은 그들의 활동이 훨씬 더 광범위하고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의사의 항일활동은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실전이 이어졌으며, 국치이후에는 행적을 숨기고 지하운동을 계속하며 기회를 노렸다. 이에 일본은 잠재세력 제거를 위해 이들의 체포에 나섰으며, 1910년 10월 총책을 맡은 유중화를 체포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말을 듣는 대신 자신의 혀를 깨물어 저들의 비행을 질책했고, 금마 주둔 일본군 헌병대는 현장에서 그를 총살했다고 전해진다. 유중화를 제외한 나머지 8의사는 1917년 밀고에 의해 일시에 체포된다. 이때의 구형죄목은 강도범이었다. 일본은 경술국치를 단행하면서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선심 쓰듯 대사령을 내렸기 때문에, 이전 행위에 대해 처벌할 명분이 없었다. 이에 일본 경찰은 경술국치 이후 이들이 솔티재라는 곳에서 행인의 돈을 강탈했다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최저 10년에서 15년까지의 중형을 내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일본은 가짜 증인까지 내세워 사건을 날조했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복역 중 옥사하거나 출옥 후 형독으로 수년을 넘기지 못하고 별세한 이가 많았다.

▲ 유중화 묘소

유연청은 12년형,유영석은 10년형, 유연풍은 12년형, 유태석은 15년형, 유연봉은 12년형, 유명석은 15년형을 각각 언도받고 옥중에서 혹은 출옥 후 사망했다. 유준석은 15년형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지만 1971년 11월 3일까지 향년 87세의 삶을 살았고, 특별히 유현석은 1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탈옥 후 이름을 바꿔 숨어살다가 1960년 6월 26일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또한 당시 함께 의병활동에 참여한 유중화의 생질 이유종은 옥사하고, 이태종은 출옥귀가 후 일본 주재소를 찾아가 할복자살했다고 전해진다.

 

▲ 유희태 일문구의사 유족회장
“고흥유씨 일문구의사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1977년 집안 어른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공적문이 최초 정부에 제출됐지만, 재판서류 등 증빙자료 미비로 반려됐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찾은 판결문에는 이들의 죄목이 항일운동과는 무관한 살인강도의 파렴치범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유희태 일문구의사유족회장은 정부로부터 구의사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까지의 험난했던 과정을 회고했다.

“판결문 죄목이 그렇게 나오자, 차라리 그대로 묻어 두자는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활동을 살인강도로 몰아 부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라, 집안 분들이 수년동안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서류를 보완해 재차 공적서를 제출했지만, 정부는 계속 침묵만 지켰습니다.”

그는 “1982년 고산향교 유림을 주축으로 구의사 조명운동이 일어났고, 주민들 사이에서도 자발적 추앙운동이 거세지자 정부는 1983년에서야 공적을 인정하고, 독립유공자 훈장을 수여했어요. 우리가 가만있었다고 한다면, 지금도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이후 정부는 활동에 비해 훈격이 너무 낮다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자, 1990년 유중화는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나머지 8의사는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각각 훈격을 높였다.

그는 “구의사 중 유연봉, 유연청, 유준석은 대가 끊기는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고 유현석은 후손이 있으나 현재 유족회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해마다 6월 6일이면 구의사를 추모하는 제사가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입구에 있는 일문구의사사적비 일원에서 펼쳐지지만, 다섯 가문의 후손이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김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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