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박도경 의병장
(7) 박도경 의병장
  • 김상기 기자
  • 승인 2011.11.28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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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유생 출신 의병장들이 봉기해 투쟁을 하던 1907년 8월, 군대에 대한 강제 해산령이 내려지자 의병항쟁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돼 대규모의 게릴라전으로 확산됐다. 이 시기에 장성 수록산의 석수암에서 의병장 기삼연이 여러 곳에 흩어진 의병을 규합 회맹함으로써 ‘호남창의맹소’를 차리고 동지를 규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의병들이 가담했다. 의병으로서의 박도경의 삶은 이때부터 본격화된다.

고창 출신 의병장 박도경(朴道京)은 본명이 경래(慶來)로서, 도경은 그의 아명이며, 자는 경화, 호는 순재, 별명은 화옥과 포대다. 그는 지금도 지역에서는 박화옥 또는 박포대로 더 알려져 있다. 본명이 박경래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이 박도경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뜻이 보통사람과 달라 평시에도 언변과 기개가 뛰어났다. 일찍이 이웃사람과 나랏일을 걱정하던 얘기를 나눌 때 동석한 사람이 이르기를 “자네는 한미한 집안이라 나라의 은혜를 받지 않았는데 어찌 그렇게까지 나랏일을 걱정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우리가 몸에 옷을 입고 곡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어느 것인들 나라의 은혜 아님이 없거늘 하물며 5백 년 동안 대대로 모두 이 나라의 신민인데 나라의 형편이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모르는 체 한다면 천리와 인륜이 어디 있는가” 라며 국가에 대한 충성은 인륜임을 강조했다.

△고창 부안 영광 일대 왜병전투 혁혁한 전공 세워

문수사

의병장 기삼연은 석수암 회맹 때부터 참모들로부터 문수사 골짜기 주막패거리의 우두머리이자 장사로 통하는 박경래의 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이에 박경래는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기삼연의 의진에 들어가 종사로 시작, 포사대장의 직책을 맡게 된다. 그는 기삼연의 호남창의맹소가 거점을 장성에서 고창 문수사로 옮기게 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대일항쟁에 필수적인 총포가 고창읍성 무기고에 많이 저장돼 있음을 탐지하고, 이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지리적으로 가깝고 요새의 형국을 띤 문수사에 본거지를 둬야 하고, 자신이 자란 곳이어서 의병을 모으기도 수월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이에 기삼연은 무장현을 기습한 이튿날인 1907년 9월 26일 맹소의 거점을 문수사로 옮기고, 참모진을 앞세워 고창읍성을 기습 공략, 많은 무기들을 탈취한다.

박경래의 선발부대는 기삼연 부대의 선발대로서 의기 넘치는 독립부대 역할을 용맹하게 수행해냈다. 그는 천보포라는 작은 야포를 들고 다니면서 고창, 부안, 장성, 영광 등지를 누비면서 수십 차례에 걸쳐 왜병과 싸워 많은 전과를 거뒀다.

1908년 1월 2일에는 의병장 기삼연이 왜적에 붙잡히고, 곧바로 처형된다. 이에 박도경이 주장으로 추대됐고, 스스로를 포대장이라 칭하고 독자적 의진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는 실전위주의 진용을 갖춰 하룻밤 새에도 2~3곳의 접전을 서둘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첨병석화전법으로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로 인해 어느 곳에 출전해도 영웅적인 환대를 받게 돼 더욱 유명부대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박포대로 별명이 붙고 명성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는 의병을 사칭하고 민가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무리들을 소탕하니 백성들이 진짜 의병은 ‘박포대 의진’뿐이라 칭송할 정도였다.

그는 백성을 괴롭히는 친일 모리배들을 징벌하기도 했다. 1908년 2월 19일 고창읍의 세리 서상달이 세금 미납자를 엄동설한에 꿇어앉히고 온갖 폭행을 다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악질세리를 끌어내 죄상을 낱낱이 읍민들에게 밝힌 뒤 천보총으로 직결처분함으로써 친일 악질관리들의 경각심을 촉구한 바도 있다.

△호남 의병장을 맡다

박도경 의병
1908년 4월 기삼연의 뒤를 이은 의병장 김용구가 왜병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는다. 이에 박도경에게 병권을 넘겨주고 장성 백암산으로 은신에 들어간다. 새로운 의병장의 중책을 맡은 박도경은 군사를 더욱 보강하고 훈련에 힘써 조직을 강화했다. 그의 부대는 무기도 다양하며 넉넉한 편이었다. 오연발기총 1정과 군대해산 이전에 진위대가 사용하던 총기 17정, 천보총 20정, 화승총 64정을 보유했고, 목포에 머물던 청국인으로부터 다량의 화약을 매입했다. 이처럼 박도경이 적지 않은 세력을 형성하자 일본은 박도경 부대 소탕에 혈안이 됐다.

특히 1909년 9월부터 일본은 임시조선파견대 사령부 보병 제1,2연대의 병력 2천260명을 대대적으로 투입, 호남지방의 동북에서 서남해안쪽으로 포위망을 압축해나갔다. 다른 지역의 의병장들이 여러 곳에서 계속 전사하거나 붙잡혀 의병들이 흩어지자, 박도경의 부대도 점점 고립돼 갔다. 할수없이 박도경은 의병들을 해산시켜 살길을 찾게 하고, 그는 홀로 방등산의 석굴에 은신해 총상을 치료하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보병 제1연대 8대대인 고창주둔군은 박도경의 아버지를 포박해 앞세우는 비열하고 간악한 수법까지 동원, 은신처 수색에 나섰다. 굴복하지 않으면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결국 그해 11월 3일 박도경은 “가족을 학살하지 말라. 그리고 체포된 동지들을 석방하라”는 조건을 내세우며 하산해 체포된다.

박도경 묘지 자리

이후 1909년 12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와 1910년 1월 18일 대구 항소원 형사부, 2월 22일 대심원 형사부에서 한결같이 사형을 선고받아 대구감옥에 수감된다. 그는 옥바라지를 위해 면회 온 노모(한양조씨)에게 “왜놈 손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자결함이 옳다”는 비장한 결심을 전하고, 노모를 통해 비밀리에 독약을 차입해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그의 나이 37세였다. 박도경은 죽기 전 간수에게 부탁해 옥중 촬영한 최후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노모에게 드렸으니, 지금 전해지는 사진이 이때 찍은 것이다. 그가 타계하자 뜻있는 대구의 아전들이 돈을 추렴해 치상을 하는데, 마침 약령시 기간이라 전라도 상인들이 많이 왔다가 이 소식을 듣고, 돈 수백 냥을 모아 고향으로 옮겨 장사 지내게 했다. 선생의 유해는 애초 고향땅에 운구돼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앞산에 묻혀 있다 1963년 3월 유림들의 결의로 고창읍 교촌리 향교산으로 이장되면서 추모비까지 세워졌다. 하지만 2011년 현재 고창에는 의병장 박도경을 떠올리게 할 흔적 하나 남아있지 않다. 2009년 후손들의 뜻에 의해 대전국립묘지 현충원으로 묘역과 추모비가 옮겨지면서, 고창에는 이제 박도경과 관련된 유적지가 전무하게 된 것이다. 고창이 배출한 걸출한 의병장은그렇게 잊혀져 가고 있었다.
 

<인터뷰> 이기화 고창지역학연구소장

“1960년대 초 선생을 국가유공자로 신청했더니, 자손이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선생의 친동생 아들을 양자로 들여보냈지. 그 양자가 고창읍성 인근에서 살았는데, 양자가 죽고 나니까 그 자손이 대전으로 가 살게 됐어. 2009년에 묘지가 옮겨진 것도 그 때문일 것이여. 여기 있으면 관리하기 힘드니까. 이 지역에서 아무도 신경써주지 않았다는 뜻도 되지. 그래도 묘역은 지켰어야하는 건데. 고창사람들이 뭔가 큰 걸 잃어버렸다는 반성을 해야는데….”

이기화 고창지역학연구소장은 박도경 의병장을 국가유공자로 만든 장본인이자 산증인이기도 하다. 포목상을 하며 홍선루라는 유명한 식당까지 운영한 중국인 왕홍선이 박도경의 여동생에 푹 빠진 이야기, 그 중국인을 통해 목포에 머물던 청국인으로부터 다량의 화약을 매입하는 과정, 호남창의맹소가 있던 문수사 앞 마을은 헌병보조원이 주재하고 있을 정도로 감시가 심했다는 것, 소형 대포격인 천보총을 들고 콩밭두렁 대여섯 마디를 단번에 뛰어 넘을 정도로 박도경 의병장의 센 힘과 민첩함 등. 어떤 이야기는 황당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기화 소장만큼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도 없다.

“묘역까지 사라진 마당에 고창에서 무얼 더 할 수 있겠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박도경 의병장을 기리는 사업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잊어버리면 그분은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러면 우리 고장의 정체성도 사라지는 겁니다.”


김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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