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면의 또 다른 이름 ‘소왕면’
소양면의 또 다른 이름 ‘소왕면’
  • 이동희
  • 승인 2011.11.2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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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조선건국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두문동 72현에 만육 최양(晩六 崔瀁) 선생이 있다. 최양(1351∼1424)은 전주 최씨로 호는 만육이며, 정몽주의 생질이다. 고려말 우왕 2년(1376)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던 대학자로, 외삼촌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격살되자 진안군 팔공산에 들어가 3년을 은거하였다. 이를 기려 진안군 백운면 반송리에 최양선생유허비(도기념물)가 서있다.

완주군 소양면에는 만육선생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화심마을에서 좌회전하여 동상면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따라 얼마 안가면, 소양면 대승한지마을이 나온다. 차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이다. 그 대승마을입구, 도로 건너 맞은편 산에 만육 최양의 묘와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대승마을은 만육선생이 은거하였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얼마 전 완주군 한지유적을 조사하면서 소양면 용연마을에 거주하는 정경렬씨에게서 만육선생과 관련하여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양면(所陽面)을 옛날에 ‘소왕면(小王面)’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소왕은 곧 작은 왕국이라는 의미이다. 정경렬씨 집안은 용연마을에서 종이를 떴는데 조부로부터 소왕면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이야기인즉 이렇다.

왕의 사신 머문 곳 왕정리

「만육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소양면으로 들어와 살았다. 친구였던 태종 이방원이 조선을 건국한 후 최양을 불렀다. 용연마을 앞 천변에서 보면 멀리 신왕리(新王里), 왕정리(王停里)라는 마을이 보이는데, 이 마을들이 이와 관련된 지명이다. 새 왕의 사신이 온 곳이라고 하여 신왕리라고 하였으며, 왕의 사신이 머문 곳이라고 하여 왕정리라고 하였다. 만육선생이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태종이 이 일대의 땅을 하사해 주었다.」

정경렬씨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 영역을 표시하는 것 같은 큰 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사람들이 소양면을 작은 왕국을 뜻하는 소왕면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얼마 후 한지유적 답사 길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답사에 참여한 김인곤씨에게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어려서 선산에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라고 하였다.

「최양과 태조가 동문수학을 하였는데, 어느 노인장이 이성계 수염을 보고 군왕의 상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최양이 네가 무슨 왕이 되겠냐고 하면서, 네가 왕이 되어도 그 밑에서 신하 노릇을 할 수 없으니 사방 십리의 땅만 내 왕국으로 달라고 하였다.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고향에 와서 최양을 찾으니 소양에 숨었다고 하였다. 최양을 불렀으나 병을 칭하고 오지 않았다. 그러자 태조가 직접 최양을 찾아 이곳으로 왔다. 왕정리는 이때 왕의 어가가 정착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왕이 왔다는 소식에 최양이 왕정리로 나가 태조를 만났다. 태조가 재상자리를 권했으나 만육선생이 이를 거절하고 돌아갔다. 태조가 이에 호위 무사에게 칼을 빼주며서 최양을 따라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겉과 속이 다른 자이니 죽이라고 하였다. 졸졸 따라가는데 최양이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집에 와서 문을 닫고 들어갈 때는 자연적으로 뒤를 돌아보게 되어 있는데 그때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에 태조가 과연 충신이다라고 하면서 사방 십리의 땅을 주라고 하였다.」

송광골짜기, 장판지 생산 대표하는 곳

정경렬씨나 김인곤씨가 전하는 이야기가 결국은 최양의 소양 연고와 관련해서 그의 충절을 기리는 의미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완주군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지명유래에는 왕정리가 태종이 대흥리에 사는 최양을 만나러 가다가 쉰 곳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또 태종이 진안 마이산에 기우제를 지내려고 가다가 머물러 붙여진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최양과 관련한 왕은 태조가 아니라 태종이 아닌가 한다.

분명한 것은 최양의 묘역이 소양면에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서부터 연유하여 소왕국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이겠지만, 충신 최양을 기리는 정신을 담고 있고 한 시대를 흥미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소양면 송광골짜기는 장판지를 생산하였던 우리 종이 한지를 대표하는 곳이다. 이러한 한지의 역사를 담은 소양면에 소왕국이라는 이야기가 더해지면 소양의 문화적 가치는 더 높아질 것이다.

이동희<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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