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르네상스적인 사람, 스티브 잡스
70. 르네상스적인 사람, 스티브 잡스
  • 문창룡
  • 승인 2011.11.22 1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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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별이 졌다. 세계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를 고안해 IT 역사를 다시 쓴 스티브 잡스다. 메킨토시 컴퓨터,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그의 개발품들은 인간의 창의성과 상상력이 빚을 수 있는 최고의 제품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계 경제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인류는 또 다른 문명의 혁명을 맛보았을 것이다. 누가 컴퓨터를 주머니에 넣고 다닐 생각을 했겠는가?

2000년대가 되면서 세계 IT업계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컨텐츠를 하나로 결합하는 융복합화를 구호처럼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수한 세계적 기업들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투입하여 IT의 융복합화를 시도했지만 이런 노력은 빈번하게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스티브 잡스는 실리콘벨리의 이단아라는 별명을 얻으며 음악 컨텐츠와 하드웨어의 융합에 성공한다. 수 조원씩을 음반시장에 투자하던 기업들은 잡스가 만들어낸 음악거래 사이트 ‘아이튠즈’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음악거래 사이트라는 독창적인 비즈니스모델을 창안해 음반 유통망을 장악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스티브 잡스의 성장배경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55년 시리아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더 자세히 말하면 결혼을 반대하는 외가의 입장 때문에 잡스의 어머니는 미혼모 신분으로 아기를 출산했다. 그리고 잡스는 입양아가 된다. 잡스의 생모는 고학력의 양부모를 원했다. 실제로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될 뻔 했으나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잡스 대신 다른 여자 아이를 선택했다. 결국 잡스는 고등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양부모에게 입양되어야 했다. 끝내 입양서류에 사인을 거부하던 생모는 잡스를 꼭 대학까지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야 입양을 허락하였다. 이러한 형편 때문에 잡스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는 없다.

스티브 잡스가 자란 캘리포니아는 기술이 매우 발달했으며 영국에서 넘어온 사이키델릭 음악과 신비주의가 유행했다. 이 두 문화는 잡스를 비틀즈의 신봉자이며 자유주의자로 만들었다. 청바지와 검정 터틀넥을 즐겨 입던 잡스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대학에 문학과 의학 공부를 위해 진학한다. 하지만 비싼 등록금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둔다. 그리고 친구의 집 바닥에서 잠을 자며 콜라병을 모아 팔고 무료급식을 먹으며 청강을 통해 서예공부를 한다. 이때 배운 서예 실력이 훗날 매킨토시의 서체에 영향을 준다. 몇 년 후 캘리포니아로 돌아 온 잡스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았다. 컴퓨터 클럽에 가입한 것이다. 그후 잡스는 클럽 사람들과 함께 부모의 차고 안에서 애플사를 설립하게 된다.

성장과정과 교육환경이 스티브 잡스만의 생명력이 되어 그의 분신인 애플사 성장의 동력이 되었다. 애플사는 많은 우여 곡절을 겪으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21세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칭송과 함께 그의 기술력을 ‘IT 융복합화’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서울대학교 융복합대학원 원장 안철수 교수에게 열광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스티브 잡스가 성공으로 이끈 융복합화는 미래사회 성장의 중심코드가 될 것이다. 물론 교육도 융복합화를 실현해야 경쟁력이 있다. 융복합화는 선택과 집중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지금 학교에는 고답적인 교육방법을 과감히 탈피하고 대세의 흐름을 읽어내는 르네상스적인 교사들의 실험정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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