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전기홍 의병장
(7) 전기홍 의병장
  • 김상기기자
  • 승인 2011.11.2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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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우리나라 신민의 불공대천의 원수다. 임진란의 화 또한 그러하거니와 을미년 국모시해는 물론이고 우리 종사를 망치고 인류를 장차 모두 죽일 것이니 누가 앉아서 그들의 칼날에 죽음을 청할 것이오. 만일 하늘이 이 나라를 돕고 조종을 돌보아 이 적을 소탕한다면 그 날 우리들은 마땅히 중흥제일공신이 될 것이다. 일체의 노략질을 삼가고, 힘써 나라회복을 위해 싸우다 죽자.”

▲ 전기홍 의병장
임실 오수 출신으로 전북과 전남 일대를 무대로 한말 호남의병장으로 활약하며 왜병 수천명을 무찌른 전기홍 의병장.

그는 1908년 음력 7월 25일 ‘대동창의단’을 조직하고 의병장에 오른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의병을 일으킨 동기를 공표하고 의병항전의 당위성을 밝힌 후 적을 치는 길에 오르게 된다. 이후 장수, 진안, 임실, 순창, 남원, 고창, 정읍, 함평, 나주, 영광 등지에서 71회의 전투를 통해 수천 명의 왜병을 무찔렀다.

전기홍(全基泓)은 1879년 지금의 임실군 오수면 국평리 고전동에서 출생했다. 자는 수용(垂鏞), 그러나 스스로 해산(海山)이라는 호로 불리기를 좋아해 전해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들끓기 시작하고, 1906년 6월 호남지역에도 최익현과 임병찬의 주도로 의병이 일어났지만, 곧바로 수습된다. 이어 전북에서는 충남 출신 김동신이 의병을 일으켜 맹위를 떨쳤고, 전남에서는 기삼연을 중심으로 의병이 크게 일어난다. 호남의 우국지사 수십 명이 참여한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는 한때 호남의병의 중심이었지만, 기삼연 의병장은 1908년 설날 아침 체포돼 총살당한다. 임실의 이석용도 ‘창의동맹단’을 구성해 거의하지만, 일본군의 공격에 많은 희생자를 내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기삼연과 이석용 의진에서 참모로 활동하다 의진을 수습, 새로운 호남의병장으로 활약한 이가 바로 전기홍이다.

△고종의 조칙으로 의병대장이 되다.

이석용과 함께 한 창의동맹단은 진안과 임실을 중심으로 전주, 장수, 무주, 남원, 순창, 구례, 곡성 등 호남 동부지역 9개 군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도처에서 맹활약을 펼쳤지만, 1908년 3월 남원 사촌전투에서 패하고, 이어 4월 진안과 임실의 경계인 대웅 전투에서의 연패로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만다. 이에 전기홍은 이석용과 헤어져 기삼연 순국 후 의진을 수습한 김태원과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그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일본군에 의해 순국한 뒤였다.

김태원 이후 의진을 수습한 건 조경환이었다. 조경환은 전기홍에게 의병장에 오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전기홍은 한사코 이를 사양했으나, 무관학교를 나온 친위대 참위 출신 정원집이 광무황제(고종)의 조칙을 휴대하고 나타나자 마침내는 뿌리치지 못하고, 1908년 7월 25일 의병대장에 올랐다. ‘의병을 일으켜서 국권을 회복하라’는 황제의 조칙을 받은 호남 유일의 의병장 신분이라 의병들의 사기와 주민들의 호응은 하늘을 찔렀다.

전기홍이 이끄는 대동창의단은 1908년 8월 의병항전을 개시한 이래 다음해 5월 의진이 해체될 때까지 일제 군경과 71회의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신속한 부대이동과 작전의 기동성을 살리기 위해 부장급의 간부들로 하여금 각기 40~100여명의 의병을 통솔케 하였으며, 자신은 평소 100~150여명의 부하들만 거느리고 작전을 수행했다. 총 500여명에 달하던 대동창의단의 의병은 평소 소부대 단위로 나눠 통상적인 활동을 하다 필요시에는 합동작전을 수행했다. 이에 한때는 당시 호남 24개군 가운데 중서부 지방을 완전 장악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호남의병장으로 중서부 장악

▲의사 전해산 추모비
이 시기에 인근에서 활약하던 10여 의진의 의병장들이 한데 모여 ‘호남동의단’이라는 대단위 조직을 형성했는데, 전기홍이 이들의 의병대장으로 추대됐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의진이 함께 행동하거나 단단한 결속력을 가질 수는 없었다. 훈련되지 않은 군사, 전술에 밝지 못한 지도부, 빈약한 무기 등으로 일본 정규군과 대규모로 맞서는 건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 상호간 연락이나 정보제공이 이뤄졌고, 상호 호응하는 자세로 투쟁을 이어갔다. 이 호남동의단의 의병장들이 전남북 지역 전체를 망라하고 있음을 볼 때, 전기홍은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였음을 알 수 있다.

전기홍은 일본군과의 직접적 전투 외에도 헌병보조원, 순경, 일진회원, 세금 징수원, 친일부호, 가짜 의병 무리 등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징계는 직접 행동으로 옮기기도 했지만 격문을 지어 반성케도 했는데, 일본의 앞잡이가 돼 세금을 걷는 세무 징수원들에게 글을 보내 추상같이 꾸짖기도 했다.

“아! 네놈들은 어찌 금수가 되려 하느냐. 무릇 왜놈을 받드는 일이라면 조금도 기탄없이 달갑게 노예가 되고, 왜놈의 명령이라면 엄하게 지키기를 우리 임금의 명령보다 더하니, 민생의 재물을 빼앗기는 성화보다도 빠르고, 제 임금을 배반하고 왜놈에게 충성해 제 아비를 버리며, 왜놈을 공경해 충성과 효도의 명예를 왜놈에게 얻으려는 것이 네놈들이 아니고 누구란 말이냐.”

△밀고로 붙잡혀 교수형으로 생애 마감

하지만, 1908년 이후 일제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서자, 의병들의 활동은 점점 위축돼 갔다. 전기홍의 대동창의단도 1909년 3월 영광 오동과 덕흥 전투에서 연패를 당하고, 5월에는 농번기로 인해 주변 농민들의 참여까지 부진해져 더 이상의 활동이 힘들어지자, 부대 지휘권을 박영근에게 넘겨주고 후사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던 것이 그해 10월, 남원 고래산에서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수개월 만에 밀고로 붙잡히고 만다. 그리고 1910년 7월 18일 박영근, 심남일, 강무경, 오성술 등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진다.

▲ 전기홍 의병장과 부인 김해김씨가 묻힌 충신열녀 쌍무덤

그해 9월 8일 시신이 번암면 대론리 원촌마을 생가로 운구돼 수천 명이 조문을 하는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상여가 집 앞 시내를 건넜을 때, 부인 김해김씨는 집으로 돌아가 극약을 마시고 자결을 택했다. 이에 상여가 다시 돌아와 쌍상여로 장례를 치렀고, 양지바른 언덕에 쌍분으로 모셨다. 경술국치 후 열흘 만에 치러진 쌍상여에 충신열녀를 보내는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한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대동의병대장 전해산장군기념사업회 김두봉 이사장

▲ 김두봉 이사장
“장수군을 빛낸 2덕 3절 5의가 있습니다. 고려수절신 백장, 조선의 명재상 황희가 2덕이고, 의암 주논개와 순의리 백씨, 장수향교를 지킨 충복 정경손이 3절, 그리고 옳은 일을 한 5의로는 백용성 조사, 정인승 박사, 전기홍 장군, 박춘실 장군, 문태서 장군입니다. 이들 중 한말 의병장 전기홍, 박춘실, 문태서 장군에 대한 기념사업이 터덕거리고 있습니다.”

대동의병대장 전해산장군기념사업회를 맡고 있는 김두봉 이사장은 장수향교 전교를 거쳐 현재 전북향교재단 이사장까지 겸임하며 활발한 활동으로, 전기홍 장군 성역화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전기홍 장군은 한말 항일의병장 중 도내에서는 유일하게 2등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인물인데, 그를 기리는 사당 하나 갖추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는 “지금도 번암면 유도회 주관으로 해마다 음력 9월 9일이면 묘역에서 추모제례가 이뤄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데 마음이 모여졌죠. 그래서 지금 사당과 기념관 등을 짓는 성역화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자금을 모으는 중입니다.”라며 그동안의 추진 경과를 설명했다.

“보훈처와 장수군 역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 머지않아 제대로 된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사업이 잊혀져가는 한말 의병장들을 역사의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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