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좀 땁시다
은행 좀 땁시다
  • 진동규
  • 승인 2011.11.17 16: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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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주는 은행나라다. 온통 은행세상이다. 떨어져 뒹구는 은행잎 하나도 지금은 제 역할이 있다. 바람에 실려 돌돌 거리다가 아픈 허리 골목에 기대어도 누구 비켜서라 탓하지도 않는다. 부지런을 떨어쌓던 대빗자루도 조심조심 나무 밑동 가까이 손잡아 모셔다 놓지 않는가.

저 하늘빛은 은행나무 노란 빛깔을 위해서만 멋진 배경이 되어 주지 않는가. 가로수에 파란 하늘의 보색 처리는 어느 화상을 데려다가 준비했다는 것인가. 어느 문호가 나선들 그만한 수필을 빚어낼 수가 있겠는가.

우리 전주의 은행나무 가로수가 미인대회에 나갈 만큼 성년이 되어 있는 줄 나만 몰랐나 보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그늘이나 주는 정도의 임무를 부여받은 가로수에 불과했었는데……. 명품이다.

“이렇게 군림하는 나무도 있네예.”

대구에서 온 친구 김 시인의 감탄사였다. 삼층, 사층 건물보다 높이 죽죽 뻗쳐 도시를 점령해버린 무법자 같은 은행나무, 빙하기도 잘 견뎌냈다는 은행나무를 점령군이 아니라 주인님께서 오셨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황홀한 은행잎 축제를 준비하느라 잎사귀 하나하나까지 모여 몇 차례 회의를 거듭했다고 들었다. 몇 번의 회의 소집이 무산되고 몇 번인가는 바람 속을 펄럭이며 밤을 밝히기도 했다는, 그래서 가을비 싸늘하게 추적이던 날 잎사귀들은 눈물의 초록빛 긍정을 나뭇가지와 함께 나누었다지 않는가.

그날로 햇살을 빨아들이던 초록은 엽록소를 분해하기로 했고 여린 가지들은 여름 내내 물을 올려 주던 나무를 챙기자고. 몸통으로, 뿌리까지로 영양소들을 보내는 의식을 갖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동안 마지막 초록의 한순간까지 노랑 색소들은 대지에 환희의 연주를 이어갔다는 것이다. 떨리는 가지가 마지막 손을 놓기까지-.

지금 전주의 은행나무 거리는 잘 어우러져 아름답다.

말 나온 김에 은행나무 관리하시는 전주시민께 한 가지 당부 말씀 드리고자 한다. ‘은행 좀 땁시다.’ 잘 아시겠지만 은행을 밟고 버스에 오르면 버스에 온통 불쾌한 냄새가 밴다.

지난 연말부터 이어졌던 시내버스 파업 때도 말 한마디 없이 잘도 견디어낸 인내심, 그 추운 겨울 넘기고 봄까지 반년 가까이도 참았는데 까짓 은행 냄새쯤이야 대순가. 아니, 거시기 영감님이랑 할머니는 옻오른다는 것도 모르고 손으로 어찌어찌하시다가 얼마나 고생하셨는데, 은행도둑 소리 들을까 봐 말도 못하고 병원 다니는 그 고생이라니.

인천 시민들은 버스 파업 한 달도 안 갔다지 아마. 큰기침 한 번으로 끝나버렸더군. 인천은 참 은행나무가 없다지? 은행 밟은 냄새 때문에 전주 시내버스는 질질질 끌려다녔다는군.

알아봤어야 했다. 우물우물 입속말이라니. 우물쭈물하는 꼴이라니. 사전에 없는 말 한번 해보자. 우물떡주물떡, 우리 동네 말이다. 떡 주무르는 솜씨를 두고 하는 말이다. 떡은 주무를수록 묘미가 있는 거 아니냐고들 한다.

우물떡주물떡이 곳곳에서 터진다. 문화재단이 떡판이었던가 본데 그걸 몰랐다. 몇 해를 두고 금과옥조로 믿어주는 용역을 주고 문화예술인이라고 하는 이들, 그 허갱이 빠진 쟁이들, 뭐 내게도 떡 한 볼테기 안 오겠나. 김칫국이나 후루룩거리는 꼬락서니라니-.

떡메는 몇 번 처대고 확실하게 처대고 뒤집는 법이다. 그러고 나서 주무르지 않던가. 슬쩍슬쩍 해 보고 뻐투로 서서 구경하는 저놈 장승한테도 한 볼테기 물려주고 그래야 사람들이 또 모여들지 않던가.

문화 예술은 관리대상이 아니다. 문화재단을 설립하면 그 안에서 스스로 전주의 은행나무처럼 멋진 연주를 펼칠 것이라고 세운 정부의 정책이 아니던가. 감히 누가 주물러 보겠다는 것인가. 떡판이라고 생각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험한 말 하는 것 아닌데. 어떤 신문은 일면 톱으로 문화재단 공중분해 했던데 아직 공중분해는 아닐 터, 아직 기회는 있다. 미처 챙기지 못한 예산 추스를 수 있는 기회가 한 번 더 왔다. 수정예산이라던가 세울 기회가 있을 것이 아닌가.

전주의 은행나무 가장 황홀하게 보는 비법 하나 알려 드리련다. 경기전에 꼭 가보셔야 한다. 공간이 그만은 해야……. 다 아신다고요? 그러시면 향교도 아시나요? 흰 고무신 몇 놓여있는 절간의 요사채 같은 데가 있지요. 우리 둘이서는 감싸 안을 수도 없는 그 은행나무, 지금쯤 푹푹 쌓여 있을 은행잎에 묻혀보는 길 말입니다.

시가지에 가로등이 켜지면 은행나무들은 대오를 갖추고 먼먼 빙하기를 건너던 그 옛날의 무대를 연출하지. 그러면 더 이상 은행나무를 따라다니지 말고 이층 창가에 자리를 잡으셔 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시켜 놓고 창밖의 황홀한 연주에 동참하는 거지. 가로등 불빛 현란하게 휘저으며 손에 잡힐 듯 나비 떼 날아오르지. 악기가 없으시다면 그냥 커피를 후후 불면 되고 아, 오늘은 편지를 띄워야겠다. 우리 은행나무 가로수에 반해버린 대구의 김 시인에게.

진동규<시인·한국문인협회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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