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양춘영 의병장
(6) 양춘영 의병장
  • 김상기기자
  • 승인 2011.11.1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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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일본제국의 보호를 받음이 한국의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로 사유하고 이에 불만을 품고, 재 한국 일본 수비대를 격퇴함과 함께 일본 관헌과 그 밖의 일본인을 한국 밖으로 추방하고, 정부를 개조해 정치를 변경할 것을 계획했다. 피고는 명치41년(1908) 음력 7월 2일 결의를 하고,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면 구화촌 회문산에 근거를 두고….”

한말 순창일대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다 일경에 체포된 양춘영 의병장에 대한 일본 재판부의 기록은 의병활동이 단순히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한반도에서 일본인을 몰아내는 것이 목표였음을 짐작케 한다. 일본군 무로다 중위는 양춘영을 쫓는 과정에서 “폭귀 양춘영의 논 11마지기의 벼를 아직껏 못 베었으니 군인을 시켜 불지르는 것이 좋지 않으냐”고 말할 정도였다. 그를 붙잡지 못하자 그의 가족들에게 핍박이 가했다. 양춘영은 순창의 회문산을 근거지로 신출귀몰한 전술로 일본군인과 경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현지 주민들은 그를 신처럼 추앙했다. 한말 호남의병사에서 전투적으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 바로 양춘영 의병장이다.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대부분 그의 자인 윤숙으로 돼 있으나 때로는 연영, 인영, 또는 춘영으로 불렸다. 그가 의병장으로 활동하면서 여러개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되나, 족보에는 춘영으로 기록돼 있다.

양춘영은 1906년 음력 4월 최익현과 임병찬이 일으킨 병오창의에 참여함으로써 의병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이때 의병 모집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4월 20일에 있었던 전투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최익현이 “동족끼리 피를 볼 수 없다”며 해산명령을 내려 의병진이 무너지자, 은신에 들어갔다.

▲ 항일의병들이 집결해 결사항전을 도모했던 순창객사 전경

190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을 재개하고, 1908년 7월 2일에는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활동했던 순창 회문산 근처의 의병들이 모여 ‘호남의군부’를 조직, 하나의 통합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양춘영은 도총독의 직책을 맡는다. 일본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이때 의병의 총 수는 1천200명이었고, 그 중 정예병을 선발해 양춘영이 직속부하로 삼았다고 한다.

의병진을 구성한 뒤 그는 순창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유격전을 펼치며 왕성한 활동력을 보인다. 1908년 8월 향관 서기협으로 하여금 22명을 인솔해 무림면 화암리 뒷산에서 일본 헌병 순사 120명과 교전했다. 9월에는 중군 최산홍으로 하여금 40명을 이끌고 남원수비대와 교전케 했다. 1909년 정월에는 후군 이국찬에게 서면 죽전리에 주둔하는 순창수비대를 토벌토록 했다. 2월에는 교련관 한자선으로 하여금 회문산 기슭에 있는 수비대를 토벌토록 하는 등 계속적인 유격전을 벌였다. 그들의 행동은 신출귀몰해 일본군은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은 양춘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됐다. 1909년 11월 19일 경찰과 수비대가 합동으로 대토벌작전을 개시했다. 전주 수비대 육군소위 금천계웅과 전라북도 사무관 김진현이 현지에서 쓴 일기를 살펴보면, 양윤숙을 체포하려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일기에 따르면, 김진현은 순창군의 인계, 팔등, 구암, 무림, 상치, 하치, 복흥과 정읍의 산내 등 8개 면의 면장들을 모조리 모아놓고, 폭도 토벌작전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기까지 한다.

▲ 양춘영 의병장이 순창군 인계면 도사리 선산에 묻혀 있다.

그러나 그에게도 힘의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09년 9월부터 일본은 군경 합동으로 대토벌작전을 전개했다. 그의 부하들은 거의 체포되거나 사살돼 지리멸렬 상태에 이르렀다. 결국 그는 단신으로 순창군을 벗어나 멀리 김제군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3일 순창의 쌍치면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대에 의해 김제군 월촌면 봉월리에서 체포되고 만다. 이로써 그는 1906년 3월에 최익현과 임병찬의 거의에 참여한 이래 4년에 걸친 의병활동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붙잡힌 지 4개월여 만인 1910년 4월 14일 교수형이 집행됐다. 이 사실은 5월 5일 관보에 고시됐다. 대부분의 의병장이 그랬던 것처럼, 양춘영도 36세의 젊은 나이로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은채 일제 사형집행으로 순국했다.

현재 양춘영의 유품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는 그의 자손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부인이나 아우들이 당한 핍박과 무관하지 않다.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화근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의 유품을 남김없이 없애버렸던 것이다.

양춘영에게는 상영, 택영이라는 두 아우가 있었다. 이들 형제는 양춘영이 처형당한 뒤에도 온갖 핍박을 받아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옮겨 다니며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양춘영의 무덤은 처음 이들 형제에 의해 고향인 순창군 구림면 국화촌 앞의 선산에 안장했다. 비록 현재도 생가터가 있고, 돼지퉁벙이라는 훈련지도 전해지고 있지만, 이 무덤마저 없었다면 현재의 우리가 양춘영을 기억할 수 있는 유형의 실체는 아무 것도 없었을지 모른다. 이 무덤은 80년이 지난 1990년 11월 순창군 인계면 도사리 선산으로 이장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인계면 소재지 조금 못미쳐 대로변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지만, 그 흔한 이정표 하나, 설명문 하나 없어 쓸쓸하기 짝이없었다.

 

- 기 고

황호숙씨
구림면지 제작에 참여한 황호숙씨

구림면지(龜林面誌)를 편집하며 내가 사는 구림이 자랑스런 항일 의병 운동가들의 요새였다는 걸 알게 됐다. 광주감옥 전주분소의 판결문과 조서에만도 구림출신이라고 명시된 사람이 47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었다. 회문산 중봉아래 돼지툼벙이라 부르는 계곡이 있던 안내앙굴이 양춘영장군의 지휘아래 활발히 의병활동을 벌이던 본거지였다는 사실이 주는 놀라움은 정말 컸다. 그러나 기록조차 흩어져있었고, 유적지 표지판조차 없었으니 자랑스런 역사가 아닌 완전 방치된 역사였다.

항일운동한 집안은 몰락하고, 일제에 빌붙은 집안은 3대가 번창한다고 한다. 총탄에 맞아 쓰러져 죽은 의로운 죽음이 그 얼마이랴!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무서워 항일운동하는 사람을 호적에서 파버린 집안도 있다. 이들은 일제의 판결문이나 조서에 적히지 못해 포상은 고사하고 어느 곳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원혼이 돼 구천을 떠돌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2005년부터 회문산 안내앙굴에 의병공원을 설립한다며 도로개설 작업하는 걸 보며 행복해 했었는데, 그것도 어느 순간 조용히 멈춰버렸다. 친일 청산도 못하고 기록도 못남겨,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 한없이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다시 한번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항일운동가들의 생애를 정리하고 부각시키는 작업이 문화콘텐츠로 진행되는 곳도 많은데, 왜 순창에선 양춘영 장군을 비롯해 수많은 열사들의 자료수집조차 안하는지 모르겠다. 당시를 기억하는 어른들이 돌아가시기 전, 항일 의병 운동가들의 활동과 행적 연구가 이뤄졌으면 한다. 그래서 의병공원을 둘러보며 아이들에게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김상기기자 s4071@domin.co.kr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취재 보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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